비트겐슈타인 번역에 대해 (2)

2.“명제”라는 번역어에 관해

2.1. 철학과 문체

비트겐슈타인의 글을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는 기존에 정립된 역어 중 여러 가지와 상당히 근본적인 층위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느껴왔다. 첫째로는 내가 영미 분석철학을 많이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어선정에서 특정한 해석의 틀에 얽매이는 바가 적다는 이유가 있겠고, 둘째로는 영역본이나 한역본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비트겐슈타인의 글을 만났기 때문에, 순전히 언어적 측면에서 이 아름다운 텍스트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아름다운”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독일어권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가지는 파급력은 문체적, 예술적 측면이 대단히 크다. 이것은 독일어의 언어사용에 민감한 독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으며, 독일어 화자는 이 부분을 감지하기 위해서 굳이 철학자일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일수록 이 점에 눈이 멀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트겐슈타인은 넓은 층의 사람들에게 읽히고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많은 철학적 독자들이 간과하는 바와는 반대로 비트겐슈타인의 글쓰기는 대단히 문학적이고, 그의 글은 훌륭한 예술작품의 특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하지만 완고한 부류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 글을 유려하고 간결하게 쓰는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에 물론 문학적 가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철학적 메시지라고 – 즉, 글의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예컨대 논리-철학-논고는, 만약 재미없는 문체로 쓰더라도 결국 똑같은 언어이론을 말할 뿐이며, 철학사에 유례없을 그 가치에 변동을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저명한 독문학자인 만프레트 프랑크는 “비트겐슈타인 – 문학가이자 철학자”(Frank/Soldati 1989)에 수록된 “문학 속으로 들어간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s Gang in die Dichtung”이라는 글의 서두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문체의 문제들을 유효함의 영역에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주장, 특히 논증의 형태로 되어있는 주장의 경우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어들과 문장들의 용법을 선택하고 조합하는 개인적인 방식 – 우리는 이를 흔히 문체라고 부르는데 –의 흔적들이 단어와 문장의 의미에 남아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의미론적 흔적들이 주장 외적인 것으로 남아있지 않고, 주장들을 관통하고, 또 변화시킨다면?

내용과 형식의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에서 심화되고, 극단으로 치닫는다. 글을 쓰는 비트겐슈타인을 자세히 관찰할수록, 우리는 그가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기파괴적인 집중 속으로 스스로를 기꺼이 던져 넣는 예술가의 형상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트겐슈타인이 어떠한 철학적 논증도 없이 탐미적인 요소만을 “철학의 형식을 빌려서” 그려내고 있는가? 그는 더 이상 진리의 탐구와 미의 추구를 구분하지 못하여, 바디우가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에서 말하듯 말년에는 “궤변론적인 장광설”로 모든 철학적 담론을 회피하는 “소피스트”로 전락하고 마는가?

위대한 철학자의 텍스트를 읽는 방법에는 항상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빚지고 있는 독법을 전제 삼아 보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과 문체의 문제는 거의 동일한 것이다. 그에게 문체는 설명적 도구가 아닌데, 철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는 “학문적”이거나 “객관적”인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문제의 완벽한 언어적 표현은 그 문제의 해결과 동치의 행위다.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철학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사실 문학으로만 쓰여져야 한다. 그리고 내 사유가 얼마나 현재나 미래, 또는 과거에 속하는지는 바로 이를 통해서 밝혀져야 한다. 위의 말을 통해서, 나는 내가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는 자’임을 고백한 셈이기 때문이다.

Ich glaube meine Stellung zur Philosophie dadurch zusammengefasst zu haben, indem ich sagte: Philosophie dürfte man eigentlich nur dichten. Daraus muß sich, scheint mir, ergeben, wie weit mein Denken der Gegenwarz, Zukunft, oder der Vergangenheit angehört. Denn ich habe mich damit auch als einen bekannt, der nicht gnaz kann, was er zu können wünscht. (VB, 483, 박술 역)

바로 이 지점에서 형식과 내용/문체와 철학의 문제는 메타철학적 문제의식, 즉 “철학한다는 것은 무슨 행위인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가 인정하는 견해가 무엇이냐에 따라, 문체의 역할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철학이 여느 분과학문과 마찬가지로 정립된 대상을 정립된 방법론으로 조사하여 결과물을 내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문체의 역할을 경시할 것이다. (“불순물 없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반면 철학적 문제가 엉킨 방식은 언어의 결을 따라서만 다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철학의 이론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일수록 문체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둘 것이다. (“철학은 사실 시와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문체의 역할에 비중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서, 번역의 방향성이 결정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항상 어렴풋이 예감만 하다가, 번역작업에서 문제에 봉착하면서 처음으로 직시하게 된 사실이다. 메타철학적 문제가 일개 번역어 선택이라는 사소한(?) 문제까지 번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에 예고한 바대로 “명제”라는 번역어를 통해서 더 자세한 고찰을 해보도록 하자.
2.2 명제

논리학에서 명제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적어도 한국어를 통해서 논리학을 바라본다면 그렇다. 명제는 무엇인가? 일반적인 이해에 따라서, 명제命題는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언어적 구조물(또는 관념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까지는 한국어 내에서의 의미이고,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 기존 의미에 딱히 이견을 제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내 언어 안에서 독일어의 “Satz”가 한국어의 “명제”와 아무래도 이토록 일치하지 않는(그리고 이런 불일치들이 나로 하여금 번역작업을 하게 했는데)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명제”는 훌륭하고 유구한 전통을 가진, “정립된” 번역어가 아니던가?

이런 의구심과 함께, 아직까지 “명제”라는 단어의 출처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성찰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국어사전을 찾아서는 어원이 나오질 않았으므로, 고전문학을 공부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이 단어의 첫 용례를 간단하게 접근해보고자 했다.

우선 조선시대와 그 이전에 命題라는 말은 “제목을 짓다”라는 의미로만 사용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매일신보에 1938년 12월 4일 문예면에 실린 글 “悟性의 解放”의 부제목으로 쓰인 “이 時代의 哲學的命題”라는 문장에서 명제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제목에 나오는 “오성”, “철학적 명제”, 그리고 본문의 다른 많은 단어들을 보아도, 일본어 번역투의 느낌이 났다. 이러한 혐의를 가지고 다시 검색을 해보니, 손쉽게 이 번역어의 원흉(?)을 찾을 수가 있었다. 니시 아마네 (西周)는 “명제”뿐만 아니라 “철학”, “시간”, “관념” 등, 우리가 한국어로 철학을 하면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번역어를 창조한 사람이었다. “철학”이 일본어 역어인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사람이 정립한 무수한 다른 용어들을 보고서는 정말 업적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고대중국문헌을 참고하는 등 대단히 철저한 방법으로 조합해낸 이 사람의 신조어들이 한국어과 심지어는 현대중국어의 번역어까지 (이따 언급하겠지만) 독점해버린 듯하다.

니시 아마네가 “명제”란 단어를 어떤 방식으로 조합해냈는지, 번역개념의 실제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한 사항을 입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일단 2가지의 새로운 의문들이 파생된다.

1) 니시 아마네(또는 메이지 번역가들 일반)는 어떤 메타철학적 전제를 가지고 이러한 번역어(들)를 주조했는가?

2) 번역은 무엇을 하는 행위인가? “정확함”과 “1:1 대응”의 개념은 철학 텍스트 번역에 얼마나 적합한가?

이 중에서 특히 두 번째 질문은 번역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정면으로 제기해야할, 꽤 근본적인 성격의 것인 듯하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문제에 답하기 전에, “명제”라는 번역어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2 Kommentare zu „비트겐슈타인 번역에 대해 (2)

  1. 어디에 댓글을 남기는게 나을까 잠시 생각해보다 이 곳을 살짝 어지럽히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덧붙여 봅니다. 제가 한자와 그 조성에 밝지 못해 그것들을 보고 어원을 서유럽어에서 희랍, 로마 영향을 추적하는 것보다 더 능숙하지 못하는게 못내 안타깝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그렇다고 서유럽어의 어원추적도 한낱일 뿐이니 할 말이 없지만)

    어디선가 들었던 근대 동아시아의 서양개념 번역사에서 일본 불교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니시 아마네를 비롯하여 모리 아리노리나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명육사(https://de.wikipedia.org/wiki/Meirokusha)의 멤버들은 홀란드나 영국 등지에서 배워 온 사람들이지만 난조 분유우(https://de.wikipedia.org/wiki/Nanjō_Bun’yū)와 같은 서양학문을 익힌 불교학자들이 있었다는 것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는 우리가 다룰 영역이 아니니까 제쳐두어야겠지만…

    하지만, 오성이나 관념처럼 불교에서 사용하는 깨달음(오성)이나 마음을 살피는(관념) 것과 같은 번역어에서 볼 수 있는 흔적에 대해서는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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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여기 댓글은 수정이 되지 않는군요. 저 두 위키링크는 공교롭게도 난조 분유우의 경우, 독어항목이 다른 언어, 심지어 일본어보다도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어서였습니다.

    돌아와서, 내용과 형식/문체와 철학의 문제 역시 술씨가 제기한 바처럼 어떤 대상을 정립된 방법론으로 하나의 (과)학적 해석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곧 이론의 여지를 제거하는 방식의 도구인 순정한 언어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는 어떤 유보를 하게 되는데 제가 여기에서 선택하는 것은 되려 방법으로 돌아가는 방식입니다.(아마도 이게 지난 포스팅에 대한 제 응답의 키워드 중 하나이고요.)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하는 점이 ‚철학은 사실, 시와 같다.’는 소위 명제는 조심스럽게, 또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씨가 이론성이라고 말했던 부분이 아마도 그 ‚-성’에 초점을 맞추어, 철학함이 인간에게 적용될 ‚보편적‘ 정식(定式)의 추구가 아닌 작자 정신의 결을 통한 개별적 기술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실, 철학이 문학으로만 쓰여져야 한다고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질 여지가 있다고 말할 때에 한해서 철학은 시와 같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문학이나 문학적이라고 말할 때 그 외연을 아주 넓게 두는 경향이 있으며 철학이 진리와 관계한다고 말할 때(그것이 진리를 추구하든, 불가해하다고 선언하든, 그 언저리에 다다르려 하지만 결국 다다를 수 없다고 체념하든간에)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거짓, 혹은 허위에 상응하지 않겠다는 어떤 선언을 담지하고 있기도 할 것입니다. 제가 조금 다른 길로 가고 있지만…이는 오직 제 문제일테고..

    형식을 가지고 원리를 설명하고 했던 많은 철학자/과학자들 중에서 앞서 보편/일반에 대한 경계, 환원에 대한 (가시적, 비가시적) 이질감을 드러내고자 했던 철학자들에게는 이중의 과제가 부여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객관적인 방식으로 일반, 혹은 보편을 탐구하는 다른 철학과의 대결과 동시에 문학과 구별되는 철학의 경계짓기로 보이는 이 둘 사이에서 문체는 (첫 번째 문제를 어느정도 전제에 두고) 두 번째 문제에 더 큰 대비를 갖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에서 자신의 형식에 유클리드의 과 같은 소위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거친 서술을 도입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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