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번역에 대해 (3)

삼천포 1. 프레게의 “Satz”를 “명제”로 번역할 수 있는가?

전 글에서 잠깐 말했듯이, Satz는 독일어로 “문장”을 뜻하며, 동시에 가장 평범한 수준의 문장이다. 너무도 그 지칭하는 폭이 넓어서 클래식 음악의 “장”도 Satz라고 부른다. Satz는 물론 “놓다”의 의미인 동사 setzen에서 파생된 명사다. 문장이란, 누군가가 “놓은 것”이다. 이 정도로 일상적인 어감을 가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Satz라는 독일어 단어가 얼마나 일상어로 이해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현대 논리학의 아버지, 고트롭 프레게의 “Über Sinn und Bedeutung”을 다시 꺼냈다. 학부 2학년 언어철학 개론 이후에 처음 접하는 글이다. 한국어로는 주로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로 번역되는 것 같다. 이 제목 자체가 사실 독일식의 유머로 읽힐 수 있는데, “이 일을 하는 의미가 대체 뭐냐?”라고 말할 때 쓰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제목의 포인트는 Sinn과 Bedeutung이 겉으로 보기에는 동의어라는 것이다. “뜻과 지시체”는 이러한 독서경험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그러나 Sinn과 Bedeutung에 적합한 역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나중으로 미루고, 오늘은 Satz에 집중하자.

제목의 문제에서도 이미 조금 드러났지만, 프레게가 사용하는 방식은 일상어를 기반으로 사유하되, 그 위에 자신의 이론을 조금씩 덧쌓아가는 방식이다. 프레게가 하려는 일은 새로운 기술적 용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영미 쪽의 사유경향에 가깝다), 일상어에서 Sinn, Bedeutung, Satz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고찰하여, 그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원래의 일상 언어는 변화되지 않으며, 하나의 또 다른 의미지평을 추가적으로 획득할 뿐이다.

프레게는 이 논문에서 주구장창 Satz에 대해서만 말한다. 논리학의 대상은 무조건 Satz인 것이다. 반면 우리가 “명제”라는 말을 들을 때, 이는 일상 언어의 문장들과 어감이 다르다. 뭔가 형식화 되고, 기술적이고, 평소에는 쓰지 않는 문장들, 즉 “소크라테스트는 죽는다”와 같이 인위적으로 정화된 문장들만을 명제라고 부를 것 같은 것이다. 반면에 “글쎄, 오늘은 계란 후라이가 좀 이상하게 됐네”나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면 내가 돌아버리지”같이 일상적인 언어적 표현은 명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화를 통해서 “오늘의 계란후라이는 조금 이상하다”나 “이 업무방식은 화자를 정신적으로 학대한다”정도로는 바꾸어줘야 할 것 같은 것이다. 물론 이는 “명제”에 대한 편견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중요한 편견이다. 이러한 편견들에 의해서 독자의 독서경험이 형성되고, 독자가 대상에 대해서 가지는 견해가 뒤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Satz는 마침표로 끝낼 수 있는 모든 언어적 구조물, 우리가 매일 보고 듣고 말하는 대상을 말한다.

그렇다면 혹시 프레게가 이상적 언어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프레게는 정말로 일상언어의 구성단위를 논리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을까? 논문의 중간부분에서 프레게는 단순히 주문장Hauptsatz뿐만 아니라 부문장Nebensatz와 부분문장Teilsatz들도 조사하기 시작한다.

[…] 그렇게 우리는 부문장들의 관찰로 넘어가게 된다. 이들은 문장구조물의 부분으로 등장하는데, 논리적 관점에서 보면 마찬가지로 문장 – 즉 주문장 –으로 취급될 수 있다. […] 문법학자들은 부문장들을 문장부분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을 명사절, 부사절, 삽입절 등으로 분류한다 […]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문법적 분류를 철저하게 지키지는 않고, 논리적으로 동류의 것이 무엇인가를 조사할 것이다. (SuB, 26)

명사절, 부사절, 삽입절 등의 표현은 전부 Nennsatz, Adverbialsatz, Beisatz등으로, Satz를 포함한다. 프레게는 이것이 문법학의 분류이기는 하지만, 논리적 조사의 대상이 된다고 보고 있다. 같은 분류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지만, 대상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프레게는 이 지점에서 명백하게 실제 사용되는 자연언어를 바라보고 있으며, 거기에 적용될 수 있는 논리적 관점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모든 언어적 현상들을 포괄할 수 있는 Satz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명제”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도저히 번역할 수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부명제들의 관찰로 넘어가게 된다. 이들은 명제구조물의 부분으로 등장하는데, 논리적 관점에서 보면 마찬가지로 명제, 즉 부명제로 […] 문법학자들은 이들을 명사명제, 부사명제, 삽입명제등으로 분류한다[…]”)

프레게의 Satz에는 당연히 논리학적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생각하는 Satz는 일반 독어화자의 Satz와는 아무튼 다르다. (한 마디로 더 복잡하고, 더 섬세한 개념일 것이다) 그는 논리를 통해서 일상언어/자연언어를 바라보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대상의 이름을 바꿀 정도로 과격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는 문법학의 용어들을 자연스럽게 논문 안에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상어를 사유의 도구로 채택하여, 유연성을 확보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일상어를 통한 철학적 사유가 좋다는, 모종의 교조적인 내용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일상어를 사용하려는 철학자의 메타철학적 결정에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소위 전문용어를 만들 줄 몰라서 만들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일상 언어의 엄청난 의미론적 우위를 잘 알고 있었던 것뿐이다.

프레게는 Satz를 정말로 일상어의 층위에서 사용한다. 즉, 어떠한 문법적, 화용론적 특징도 부여하지 않고 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문장”으로 번역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논고”에 나오는 Satz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정관사를 동반한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Satz는 Der Satz다. 논고의 특정한 부분들과 결합해서 보면, 이것은 이상언어구축으로 향하는 첫걸음이 언어사용의 문법적 측면에서 드러난 것같은 느낌을 준다. 부정관사와 함께, 또는 관사가 없이는 사용되지 않는 일상어의 단어라니, 정말 괴벽에 가까운 언어사용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 특징이 부여되었다면, 번역에서는 “명제”라는 전문용어의 지위를 주어도 좋지 않을까? 다음 글에서는 Satz라는 말을 고른 것이 “논고”의 체계 내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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