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번역에 대해 (4)

4. „명제“의 번역에 대해서: „논고“와 „탐구“의 관계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있다. 그런 말은 침묵보다 못하다.”

“논고”의 기본태도는 철저하게 윤리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윤리적이고, 예술가적이고, 종교적이고, 신비적이라는 것은 민감한 독자라면 누구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집필할 것은, 전통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속하던 “진리”가 자연과학에 덧씌워지는 과정에 대한 윤리적인 반응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바디우가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에서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진리라는 이름을 자연과학적 문장들이라는 아주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두어버리고, 그것을 통해 존재의 본질적인 부분(예술, 종교, 신비적인 것)을 구해낸다. 절망에서 나왔을법한 이러한 철학적 움직임의 댓가는 성스러운 언어의 소실이다. 세계에 더 이상 진언은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인간은 잃어버렸으며, 거기에 대한 가장 철저하게 윤리적인 반응은, 중요하지 않은 것만을 명확하게 말하며, 그 외에는 오직 침묵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말을 통해서 말의 종류를 나눠야만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것은 “논고”를 읽는 데에 있어서 아주 핵심적인 사항이다. 언어가 무엇인지를 규정하기 위해서, 그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니 생각에 경계선을 긋고자 하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이 아니라 생각의 표현에 경계선을 긋고자 한다. 왜냐하면 생각에 경계선을 그으려 한다면, 이 경계선의 양 측을 모두 생각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계선은 오로지 언어 내에서만 그어질 수 있으며, 경계선 너머에 놓인 것은 단순히 어불성설이 될 것이다. (TLP, 서문, 박술 역)

생각과 달리, 언어는 비논리적일 수 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지만, 말도 안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내가 Unsinn에 대한 역어로 “어불성설”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의미가 있는 말, 의미가 없는 말. 이를 언어 단위로 확장해보자. 언어는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명제”라는 역어를 선호하는 이라면 여기서부터 문장=명제로 읽으면서, 뜻이 통하는지 살펴보길 바란다) 문장은 뜻을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다. 그러나 문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전부 뜻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잘못 구성되거나,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만들어진 (특히 철학적 편견이 포함된) 문장은 그 겉모습은 문장과 같으나, 사실 어떤 뜻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우리말에서는 이런 언어적 구조물을 흔히 ‘비문’이라고 부르는 아주 좋은 전통이 있다. (사실 Scheinsatz는 “가짜문장”이나 “사이비 명제”가 아니라 “비문”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하고자 하는 작업은 비문의 조건을 체계적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비문은 주로 문법적인 측면을 관찰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측면을 관찰하고자 한다. (논리와 문법의 관계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과 후기철학 간의 관계와 또 복잡하게 얽혀있으니, 따로 풀어 쓰지는 않겠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논리적 기준에 맞지 않는 언어적 구조물들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하고자 하며, 그를 통해 자격 없는 자들이 윤리적인 침묵을 깨는 것을 금지하고자 한다. 그러려면, (여기부터가 핵심인데) 그가 제시하는 ‘올바른 언어적 표현’의 기준은 언어현상전반에 해당되어야 한다. 우리말에 있는 문장-비문의 관계처럼, 그는 말 속에서 말이 되는 말과, 말이 안 되는 말을 골라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 비트겐슈타인이 만일 한국어 모국어 화자였다면 – 그는 “명제”라는 말로 언어현상 전반을 지칭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제는 그가 제시한 기준에 맞는, 그리고 사실상 다다를 수 없으며, 윤리적 충동에 의해서 구축된 대상에만 어울리는 이름이다. 정말로 원소명제(원소문장)들이 존재한다면, 정말로 논리공간이 있다면, 정말로 논리형식이 세계의 구조라면, 그리고 명칭들이 정말로 대상들을 1:1로 직접 지칭한다면… 말이다. 그러한 이상적인 조건을 비트겐슈타인은 현실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아무리 자신을 사유의 극단까지 몰아가도, 원소명제에 해당하는 사례 하나를 발견하지 못한다.

“논고”에서 드러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현실과 이상 사이를 헤매고 다니는 종류의 것이다. 그가 말한 Satz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자연언어의 문장이면서, 동시에 그가 언어에 요청하는 것, 즉 그가 나중에 “탐구”에서 “순수한 중간존재reines Mittelwesen”라고 비판하게 될 그것이기도 하다. Satz라는 말에는 이 긴장관계를 버텨내야 하는 숙명이 지워진다. (그리고 신비롭게도, 이 단어는 그 긴장을 실제로 견뎌내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 안에서 언어에 경계를 지으려는 것은, 그 경계지음을 수행하는 단어 자체에도 경계가 그어지기 때문에, 결국 모순으로 귀결된다. 마치 심신이원론을 주장하는 데카르트가 송과선을 영혼과 육체 사이의 중간존재로 본 것처럼, 순수한 논리의 세계와 현상세계 사이를 이어주는 비트겐슈타인의 구원자, 순수한 중간존재는 바로 ‘문장/명제’인 것이다.

위에서 지금 나는 ‘문장/명제’라고 말했다. 순수언어의 환상에 빠진 정신은 논고에서 “명제”만을 볼 것이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 그 환상의 환상성을 똑바로 보는 정신은 “문장”을 “명제”로 읽고 싶어하는, 그렇게 쓰고 싶어하는 젊은 비트겐슈타인을 볼 것이다.

자, 조금 거친 솜씨이긴 하지만 이제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논고”의 환상을 환상으로 보는 자는, 바로 비트겐슈타인 자신이다. 젊은 자신을 보고 감탄하며, 슬퍼하고, 온 힘을 다해 겨뤄볼 만한 상대로 인정하는 성인이 여기에 있다. “논고” 집필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1936년의 겨울에 또다시 노르웨이의 오두막에서 앉아, 장성한 (47세)의 비트겐슈타인은 젊을 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유혹적이고, 강렬하고, 참을 수 없는 환상이었는지를 알아본다. 마치 젊은 시절 연애의 기록을 오래 잊고 있다가 다시 발견한, 오래된 로맨티스트와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아직 “탐구”를 제대로 번역할 수준은 되지 않지만, 논의를 끝맺기 위해서 탐구의 107번 지적을 번역해보겠다.

우리가 실제 언어를 자세하게 관찰할수록, 실제 언어와 우리의 요구사항 사이의 충돌은 더욱 강렬해진다. (논리의 크리스탈과 같은 순수함은 내게 항복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요구사항이었을 뿐이다.) 충돌은 이제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변하고, 요구사항은 공허한 것으로 바뀔 위협에 처해있다. – 우리는 얼음판 위로 올라와 버린 것이다; 여기는 마찰이 없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는 이상적인 조건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걸음을 옮길 수도 없다. 허나 우리는 걷고자 한다; 그렇다면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바닥으로 돌아가라!

Je genauer wir die tatsächliche Sprache betrachten, desto stärker wird der Widerstreit zwischen ihr und unserer Forderung. (Die Kristallreinheit der Logik hatte sich mir ja nicht ergeben; sondern sie war eine Forderung.) Der Widerstreit wird unerträglich; die Forderung droht nun zu etwas Leerem zu werden. – Wir sind aufs Glatteis geraten, wo die Reibung fehlt, also die Bedingungen in gewissem Sinne ideal sind, aber wir eben deshalb auch nicht gehen können. Wir wollen gehen; dann brauchen wir die Reibung. Zurück auf den rauhen Boden!

(PU, §107, 박술 역)

“철학적 시”라는 장르가 있다면, 이런 글에 해당하리라고 본다. 크리스탈과 얼음판의 대립, 복종, 요구사항, 위협, 충돌 등의 전쟁을 연상시키는 단어들과, 한 평생을 끌고 온 문제들을 “거친 땅바닥으로 돌아가라!”라는 호쾌한 명령문 하나로 단칼에 잘라버리는 솜씨… 이것이 정말 대가이며, 진짜 철학자다. 문체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감상에서 벗어나서 원래 이야기로 돌아오자.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문장”에서 “명제”를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1922년에 “논고”의 영역본을 만들 때에도 “sentence”라 쓰지 않고 한사코 “proposition”을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15년 뒤에 바라보니, 언어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그것은 대로가 쭉쭉 뻗은 계획도시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꼬불꼬불한 길들이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중세마을의 이미지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를 기술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 인생 후반부의 열정이 되었다. 이렇게 “철학적 탐구”의 근본정신은 바로 “논고”에 대한 반향에서 시작되었다. 저 아름다운 그림이 환상이고, 키메라고, ‘공기로 지은 건물Luftgebäude’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명제”라는 말로 “문장”을 대체하고 싶을 만큼 (독일어로 표현하면, 모든 Satz앞에 정관사를 붙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러한 해석, 다소 과격할 수도 있는 나의 독법이 Satz의 역어를 “문장”으로 할 것인지 “명제”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던져주는 실마리는 과연 무엇인가? 이토록 한 사람의 철학전반을 정합성 있게 이해해야만, 역어를 고를 수 있는 것인가? 서적 하나의 정합성을 따지는 것으로는 부족한가? 예컨대, “명제”라는 이상적 언어적 대상을 좇을 때를 그렇게 “명제”로 번역하고, 말년의 변덕으로 인해 젊은 시절의 견해를 폐기한 후에는 알아서 “문장”으로, 그렇게 번역하면 안 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답도 비트겐슈타인의 목소리를 빌려서 제시해 보겠다.

4년 전에, 나의 첫 번째 책(“논리-철학 논고”)를 다시 읽고 그 생각들을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내게 갑자기 떠오른 것은, 그 책의 오래된 생각들과 여기 이 새로운 생각들을 함께 출판하는 게 좋으리라는 것이었다: 둘 사이의 대립을 통해서만, 그리고 내 예전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삼았을 때에만, 나의 새로운 생각들이 비로소 올바르게 조명될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이는 16년 전에 내가 다시 철학하기를 시작했을 때, 첫 번째 책에 남겨둔 중대한 오류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

(“철학적 탐구” 서문 중, 박술 역)

만년의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여정을 관통하는 어떤 대립관계를 보았고, 그 대립관계가 후반기의 새로운 철학을 통해서 해소되었다고 보았다. 두 권의 책을 하나로 묶고 싶다는 서문의 표현은 그런 면에서 대단히 감동적이다. 격렬했고, 모순적이었고, 절망적이었던 젊은 시절과의 내적 화해가 있는 것이다.

그런 대립과 화해의 역사를 읽으려면, 적어도 젊은 비트겐슈타인과 만년의 비트겐슈타인이 하나의 대상, 즉 Satz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유했다는 점이 용어 층위에서 이미 드러나야 한다. ‘논리’라는 핵심 개념은 만년에 ‘문법’으로 변화하지만, Satz(문장), Wort(단어) 등의 기본적인 말들은 (용어가 아니기에) 그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헌데 Satz에서 이렇게 대립과 화해가 이루어지도록 하려면, “명제”(논고)와 “문장”(탐구)으로 나누어버려서는 안 된다. 통일되게 번역하지 않으면, 두 명의 비트겐슈타인을 화해시킬 수가 없다. 그것은 내 안의 정신적 지형을 반영하지 않는 번역일 것이다.

이상적인 방식은 하나의 용어를 쓰되, 용어 외적인 방식으로 그 대립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문장’이라고 따옴표로 표기하거나, 폰트를 다르게 하거나 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니면, 논고의 선언적이고 절대적인 어조를 더욱 강조하여 옮겨서, 자연스럽게 “문장”이라는 말에도 그러한 의미가 배어들게 해볼 수도 있겠다.

대립관계를 나타내기에는 “명제”/“문장”으로 구분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논고”와 “탐구” 사이에 있는 무수히 많은 다른 글들은 어떻게 번역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또 발생한다. 그런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은 어느 시점부터 논리원자론을 벗어났는가?” 따위의 해석의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학설에 따라서 1932년에는 “명제”를, 1933년 봄에는 “문장”을 쓰게 되는 종류의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결국 가장 큰 해석의 틀만을 정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석의 틀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여정에는 어떤 근본적인 단절도 없었고, 만년의 비트겐슈타인은 젊은 시절 철학의 모순과 문제들을 대체로 해결하여 더 거대한 사유 안에 편입시켰다”로 설정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좋은 전제일 것이다. 이는 미래의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결정이지만, 지금까지 분석철학 일변도였던 국내 비트겐슈타인 수용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의 비레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희망도 있다.

“Satz”는 “문장”이다.

“명제” 역시 관점과 해당 텍스트에 따라 정확한 역어일 수 있으니, 해석하는 사람의 자유에 따라서 바꿔서 인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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