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예민한 민족“

정신이 어두운 시간에 니체와 같은 철학자의 글귀들이 한 무리의 횃불처럼 희번뜩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대단한 민감함을 가지고 삶의  고통을 겪고, 그것을 사유로 승화시켜낸 최고의 사상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인은 살기 위하여 더없이 심각한 절박함에서 그 신들을 창조하였다. 우리는 그 과정을, 흡사 장미꽃이 가시덤불 속에서 피어나듯, 근원적이고 공포스러운 거인적 신들의 질서에서 벗어나 아폴론적 아름다움의 충동을 통한 기나긴 이행을 거쳐 올림포스 신들의 환희의 질서가 전개된 것으로 상상해야 할 것이다. 한 차원 높은 광휘에 휩싸인 채 그들의 신들에게서 현존이 내비치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예민하게 느끼고, 그토록 격하게 욕망하고, 그토록 전무후무하게 고통에 예민했던 민족이 달리 어떻게 현존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예술을 삶으로 불러들이는 충동이야말로, 살아남으라고 유도하는 현존의 보충이자 완성으로 올림포스 세계까지 탄생시켰다. (비극의 탄생, 3장, 김출곤/박술/최성웅 역)

 

이런 통찰은 과민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가 되고, 일종의 연대의식을 이루게 해준다. 여기에서는 그 매개가 „그리스인들“이라는 (물론 상상된) 민족이며, 그 원류로의 회귀를 통해서 니체는 자신과 같은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모은다. ‚고통받는 자들이여 – 당신들이 바로 신들을 지었으며, 신들을 부쉈으며, 새로운 신들을 엮을 자들이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젊은 니체는 아직 차라투스트라라는 예언자의 어조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그 사상의 파급력은 충분히 감지가 되고 있다.

얼마전에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죽음의 문제’나 ‚구원의 문제’를 이해시키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내가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선에서 이해를 거두는 듯했다. 반면 나에게는 이러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감각이 예술과 종교와 철학의 원인이자 이유라고 생각된다.

 

마치 우리가 삶 속에서 죽음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일상적인 이성 안에서도 광기에 둘러싸여 있다.

Wie wir im Leben vom Tod umgeben sind, so auch im alltäglichen Verstand vom Wahnsinn.

(MS 127)

 

비트겐슈타인 역시 모든 철학의 전제조건을 „죽음“내지는 „광기“로 여겼다. 병역의 의무가 없는데도 자원해서 1차대전의 참상 속으로 뛰쳐들어가는 젊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애국심은 아주 극히 일부의 동기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후방에서 오랜 시간 임무를 수행하다가 마침내 최전선에 배치되었을때,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정찰대에 자원한다. 그리고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 넣는다: „이제 비로소 죽음과 눈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고결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죽음이야말로 생에 의미를 부여한다“라고 말한다.

마흔이 넘어서 철학으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 Skjolden의 오두막에 혼자 앉아서 태양 없는 겨울을 보내면서, „철학적 탐구“라는 위대한 책의 초고를 쓴다. 그 책의 생성과정과 함께했던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광기과 죽음과 어둠에 대한 공포, 극단적인 외로움과 고통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극지방의 겨울은 길고, 해가 처음으로 뜨는 것은 3월 무렵이 되어서인데,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일기에 마치 구원을 기다리는 죄인과도 같은 문체로 „일광 관측기“라고도 부를 수 있는 기록을 남긴다. 같은 시간 (여기부터는 고증이 끝나지 않은 나의 가설인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89-133을 써내려간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자, 스스로의 빛을 찾으리라! 자료가 너무 부족하여 이미 한번 고증에 실패한바 있지만, 그래야만 했을 것 같다는 필연성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비이성적인 직관이 진짜 연구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명확함을 위해서 정확성을 조금 희생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논리-철학 논고“라는 위대한 책 역시,  사실 논리학에 대한 책이 아니며, 이 책은 의미를 경험하려고 몸부림 치는, 절망과 고통에 지친 영혼이 „살기 위하여 더없이 심각한 절박함에서“ 창조한 것이라고 말이다. 단지 그가 심연에 접근하는  경로가 우연히 논리였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모순되게도, „논리에는 우연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논리“ 자체가 우연이라니!)

죽음과 광기, 이 두가지는 인간이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데에서 진정한 괴물이며, 심연이다. 이러한 심연들은 철학이 성립하기 위해서 필요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보면 철학은 그러한 심연들을 견뎌내기 위한 장치다. 철학은 고통받는 자에게는 위안이다. 그래서인지 비트겐슈타인의 심연에는 이상하게 따스한 색채가 있다.

 

철학을 할 때 우리는 오래된 혼돈 속으로 내려가야 하고, 또 그곳이 편안하다고 느껴야 한다.

Beim Philosophieren müssen wir ins alte Chaos hinabsteigen, und sich dort wohlfühlen.

(MS 136)

 

그의 글에서 내게 익숙한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 사람의 철학을 공부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처음 접근하는 사람에게 비트겐슈타인이 내뿜는 매력은 가장 이론적인 부분에 있기도 하다.  나 역시 „논리-철학 논고“의 이론적인 문제들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을 만났고, 그것을 해결하려다가 수학 부전공이라는 (졸업 점수에 악영향을 미친) 터무니없는 선택을 했다. 나중에는 „사적 언어 문제“ 때문에 몇달을 고민했고, 거기에 대한 이론적 답도 찾았다고 믿으며 논문을 썼지만, 결국 그것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던져놓은 함정들이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 그런 함정을 만들어 둔 그에게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방식은 사실 서양철학자가 좀체 쓰지 않는 방식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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