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철학 논고” 판본 비교

현재 국내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처녀작인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Tractatus-Logico Tractatus 의 번역본이 3가지 존재한다.

  1. 곽강제 역, 「논리철학론」, 서광사(2012)
  2. 이영철 역, 「논리-철학 논고」, 책세상(2006)
  3. 김양순 역,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동서문화사(1994)

한마디로 말하면 이 세 가지 판본들은 질적 차이가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읽어본 사람이라면 예상했겠지만, 그 퀄리티는 위에 나열한 순서대로다.

1. 첫 번째로 김양순의 역을 보자. 이것은 세권 중에 가장 오래됐으면서, 동시에 가장 수상한 판본이다. 책에서는 김양순 번역가의 약력을 “성신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다. 독일 뮌헨대학에서 심리학 전공, 심리치료자격을 취득하과, 옮긴책 미하엘 엔데 「끝없는 이야기」 프로이트 「정신분석 입문」 「꿈의 해석」 등이 있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동서문화사의 판본. 가격(12000원) 탓인지 벌써 2판 4쇄에 달했다.

철학적, 문체적 난이도에서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는 비트겐슈타인이지만, 그의 저서를 번역하기 위해서 반드시 대학철학 교육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점검해보았다. 그러나 김양순 역의 「논리철학논고」에 붙어있는 주석들은 틀림없이 아카데미즘의 영역에서 나온, 수준 높은 전문가가 붙인 주석이다. 예컨대 보편양화사를 설명하는 37번 주석을 보자.

“‘(x)’는 ‘전칭기호’라고 불리는 것이며, ‘(x).fx’는 ‘모든 x에 대하여, x는 f이다’ (또는 ‘모든 것은 f이다’)라고 읽을 수 있다(역주보충 ‘논리기호의 의미에 대하여’ 참조)

이 주석을 따라가서 권 후반부의 역주보충 ‘논리기호의 의미에 대하여’를 보면, “수학원리”에 나오는 형식논리표기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표기법은 지금은 쓰이지 않는 것으로, 언어로 치면 사어死語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도 수준의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비트겐슈타인과 현대논리학을 잘 알고 있는 역자이어야만 한다. 게다가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원리”의 표기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인데, 국내에 번역된 적도 없는 “수학원리”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인용하다니 놀랍다.

이런 지점들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예를 들어 40번 주석은 단순한 역주가 아니라, 해석의 영역이다. 이는 Raumbrille(공간 안경)에 대한 설명이다. “색 있는 안경을 쓰면 세계는 그 색을 띠는데, 그 색은 대상이 가진 색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간’은 세계 그 자체의 구조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구조이며, ‘공간 안경’을 쓰고 세계를 보기 때문에, 세계는 삼차원적으로 나타난다. – 대략 이러한 생각이 여기에서 비판되어진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 정도 해석을 할 수 있는 역자가 “역자의 말”이나 “해제” 하나 정도도 남기지 않고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단장이라는 거대한 세 권의 책을 번역했을까?

여기까지 의심을 진행하고, 일본에서 공부한 친구에게 “논고”의 일본어 판본이 있으면 주석부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은 이와나미 문고에서 나온 論理哲学論考 (岩波文庫)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판본인데, 이것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모든 주석의 순서와 내용이 동서문화사 판본과 일치했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베껴서 넣은 것이다. 한 사람의 연구자가 시간과 노고를 바쳐서 연구하고, 번역하여 주석을 달아둔 결과물을 이렇게 파렴치하게 표절한 뒤에 마치 독어원문을 번역한 것처럼 출판하다니, 경악스럽다.

이와나미 문고판. 역자는 노야 시게키. 관련 해설서도 출간한 것으로 보아 중견 연구자인 것 같다.

게다가 이 책은 짜깁기 편집본이 틀림없다. 「논리철학논고」에서 그렇게 풍부하던 주석은 「철학탐구」에 들어서면 완전히 사라진다. 과연 「철학적 탐구」가 그렇게 자명하고 쉬운 책일까? 아마도 원역자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서 주석들을 삭제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종적으로, 이 책에 대한 신뢰는 책에 수록된 세 번째 텍스트, “반철학적 단장”에서 완벽하게 무너진다. 이 세 번째 부분마저도 일본어 해적판이 분명하며, 고증은 원문을 보지 않더라도 아주 쉽다. 인물 이름의 음독을 통해서 쉬이 드러낼 수가 있다.

신판 머리글(1994년)을 보자. (448-49쪽)

여기에 나오는 「반철학적 단장」의 신판은 아로이스 피히라의 작업이다.

또한 450쪽의 “편집 노트”를 보면

[…] 1978년 판은 1984년의 즈아캄프판 비트겐슈타인 저작집 제8권에 정정 추가되었다.

“아로이스 피히라”는 “Vom Buch zum Album”이라는 기념비적인 박사학위논문을 쓴 연구자Alois Pichler로, 지금은 베르겐 문헌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내가 지금 번역하는 일기의 초고와 팩시마일도 이 분의 협조를 통해서 제공 받은 것이며, 학회에서도 자주 보이는 소위 유명인이다. 이 이름을 읽으면 알로이스 피힐러가 된다. 정말로 독일에서 공부하신 김양순 번역가가 옮겼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일하게, Suhrkamp 출판사의 상호가 “주어캄프”가 아니라 “즈아캄프”로 옮겨질려면 독어를 아예 모르는 역자거나, 대단한 음성학적 상상력을 지닌 역자여야 할 것이다. 동서문화사는 중역의 흔적을 가리려는 최소한의 시도마저도 하지 않았고, 원래 역자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는 원전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는 독자의 무지를 이용하여 책을 팔았다.

그렇다고 해서 동서출판사 판본(김양순 번역가가 독어 원문에서 번역했을 가능성이 제거되었으므로, 김양순 역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한다)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어 중역(판본은 모르겠지만)인 「철학적 탐구」는 이영철 역의 그것보다 훨씬 더 문장과 개념이 깔끔하다. 아마도 이와나미 문고의 논리철학논고와 다르게(이것은 영역을 기초로 한 번역이다), 탐구의 초역은 독일어 원문을 옮겼다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학문-출판윤리적 이유에서 동서출판사 판본을 구입하지 않을 것을 제안하지만, 「철학적 탐구」를 보려는 독자는 가독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책세상 판본 보다는 이것을 보는게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직접 번역 비교를 하면서 느끼게 되겠지만, 이제는 혐의가 확정된 중역본 「논리철학논고」마저도 책세상 판본보다는 가독성이 뛰어나다. 이는 사실상 정본취급을 받는 책세상 판본에 얼마나 단점이 많은가를 알게 해주며, 또한 왜 국내에 아직까지도 저런 해적판들이 버젓이 팔려나가고 있는지를 새삼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2. 책세상 판본

논문 등에서 인용 기준이 되고 있는, 비극의 책세상 판본.

동서문화사의 해적판을 논외로 한다면, 이영철 선생님의 번역이 국내초역일 것이다. 이 판본은 초역이 가질 수밖에 없는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단점은 언어적 측면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사용은 대단히 섬세하고 정교하다. 특히 일상어와 개념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둘 사이의 긴장을 이용하여 구축된 표현은 번역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다. 또한 1910년대의 독일어와 현대독일어의 차이를 잘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면 여러 문장에서 실수를 범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처음 두 가지의 어려움 때문에 영역본을 참고하게 된다면, 영미권 번역가들의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위험이 있다. 영역본에는 비트겐슈타인이 직접 개입했던 초역(1922년)이 있고, 이를 Pears와 McGuiness가 보완한 판본이 주로 사용되는데, 이영철 번역본도 이 영역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많은 주석에서 독일어가 아니라 영어로 된 용어를 인용한다는 사실이 이를 가장 극명하게 뒷받침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영문 초역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번역어 선택 등에 관여했다고 해서, 좋은 번역이 되리라는 법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첫째로, 비트겐슈타인의 영어 감각이 (좋은 말로 하자면) 대단히 독특했고, 1922년 즈음 그의 영어실력은 결코 수준급이 아니었다는 문제가 있다. 번역자와의 서신교환을 보면, 비트겐슈타인은 correct를 correkt로 적고(한번이 아니라, 수십 번을! 그리고 다른 스펠링 실수들도 정말 많다), 단순한 구문 형성도 독일어식으로 하는 등, 그의 영어실력에 적어도 몇 가지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두 번째로, 번역자였던 프랭크 램지Frank Ramsey의 독일어 실력은 이것보다도 더 좋지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아주 뛰어난) 수학자였기 때문에, 언어적 표현의 섬세함에 집중하기보다는 내용의 논리적이고 명확한 전달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는 기본적인 독일어 문장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고, 이를 비트겐슈타인이 일일이 고치는 작업이 뒤따랐으며, 결론적으로 책에 등장하는 관용적 표현, 언어유희같은 것은 초기부터 대다수 잡아내질 못했다. 처음부터 이중언어사용자나 번역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쉽게 말해서 “번역초보자”들의 노력으로 힘들게 번역된 것이 영역판 “논고”번역의 토대인 것이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초반에 자신의 저작의 번역에 깊게 관여한 것이, 후에 그의 철학에 대해서 발생한 오해의 상당부분을 자초했다고 본다.

본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책세상 판본에서 나타나는 역자의 독일어 감각은 완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잦은 오역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내게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이 텍스트가 가진 빛나는 문체가 거의 완벽하게 소실된다는 점이다. 「논고」는 뛰어난 철학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훌륭한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세기에 독일어로 쓰인 철학책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상세한 번역 대조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으므로, 잠시 후에 곽강제 선생님의 번역과 한꺼번에 논하도록 하겠다.

3. 서광사 판본

서광사의 번역은 비교적 최신의 것으로 2012년 출판되었다. 나는 이 번역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아마 제목이 「논리철학론」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얼마 전에 바디우 독서모임에 나갔다가 다른 참가자 분이 가지고 계신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광사 판본은 현상황에서 언어적으로는 가장 깔끔하고 정확한 번역본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Pears/McGuiness가 보완한 영어 초역본을 기본으로 삼은 중역이기 때문에, 독어->영어로 옮겨지면서 일어났던 정보손실이 그대로 번역문에도 나타난다. 문체의 문제 역시 존재하지만, 일단 역자의 한국어 사용이 훨씬 유려하고 또 여러 차례 윤문을 거친 모양인지 그냥 보기에는 깔끔하며, 세부내용으로 진입하지 않는다면 눈에 띄는 큰 단점은 아니다.

서광사 판본의 가장 큰 문제점은 편집과 레이아웃에 있다. 「논고」에 나오는 1, 1.1, 1.12 의 숫자들은 문장의 논리적 중요도를 표시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즉 저자는 이미 숫자표기체계를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표현방식을 완성해놓은 것이다. 그 외에는 텍스트 층위에서 어떠한 강조나 비교적 우위도 만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서광사 편집부는 무슨 생각인지 소수점 없는 1은 아예 장章 단위로 사용해서, 새로운 장이 시작하는 곳에는 페이지를 새로 사용하고, 1을 마치 일부 양서에서 단원의 첫 글자를 아주 크게 키워 쓰듯이 그렇게 큰 형태로 쓰고 있다. 정말 경악스럽다! 원전의 훼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1, 1.2, 2.2 등, 중요도에서 2위를 차지하는 문장들은 폰트도 굴림이고, 폰트 크기도 다르고, 볼드처리도 되어있다. 나아가, “중요한” 문장들의 앞에는 한 줄을 비워두었다. 원문의 간결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러한 본문 구성은 폭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당연히 무지했을 편집부에서 이런 방식을 제안했다고 해도, 왜 역자 곽강제 선생이 나서서 말리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다.

서광사 판본. 편집과 레이아웃에 심각한 결점이 있지만 언어적으로는 가장 깔끔하다.

서광사는 언어적으로 세 판본 중에서 가장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편집과 레이아웃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그 가치를 크게 절감시켜버렸다. 비트겐슈타인이 살아있었다면, 마치 자신의 “변신” 판본의 표지에 바퀴벌레가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을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으리라.

철학서인데 내용과 언어가 정확하게 번역된 것이 중요하지, 레이아웃이나 폰트, 볼드처리가 뭐가 중요하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이런 식으로 「논고」의 본문을 편집하는 자는 이 책에 담긴 철저히 윤리적인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있다. 젊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윤리와 미학은 하나다…

더 중요한 점은 독서경험의 왜곡이다. 글자체, 글자 크기, 빈 줄의 삽입, 장의 구분 등의 요소들은 독서경험을 크게 좌우하며, 원래 없던 의도를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같은 문장도 다른 방식으로 착색된 의미로 읽게 만든다.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인간이 다른 얼굴을 하고 독자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저번 글에서 이야기 했던 철학과 문체/내용과 형식의 문제와도 깊게 연관되는 부분이다.

페이스북의 관련 포스팅에서 이미 http://begray.tistory.com/의 주인장이신 이우창 님과 좀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눈 사항이긴 하지만, 「논리철학론」이라는 제목에도 문제는 있다. 한번 더 같은 내용을 쓰고 싶지는 않으므로 이 부분은 2부에서 이어서 다루도록 하겠다 (내가 생각해도 게으르지만, 할 수 없다. 게으름은 불가항력이다).

오늘 원래 하려고 했지만, 동서문화사의 판본이 해적판이라는 것을 고증하다보니 흥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다 빼앗기고 말았다… 2부에서는 실제 번역문의 비교를 통해서 지금까지의 오역들을 예시적으로 제시하고, 새로운 번역이 어떤 지점에서 요구되는지를 생각해볼 계획이다.

2 Kommentare zu „“논리-철학 논고” 판본 비교

  1.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논고를 독일어판과 영역본을 함께 읽어보려 하는데요, Pears/McGuinness이 번역한 것과 Ogden이 번역한 것이 있더라고요. 두 번역 중 둘 중 어느 것이 나을까요?

    Liken

    1. 반갑습니다. 오그덴 번역본이 비트겐슈타인이 직접 감수한 것이라 사료로써 가치는 높습니다만, 1920년대 당시 비트겐슈타인의 영어감각이 독특함을 넘어서 비정상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읽기에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피어스-맥기네스 역이 대단히 일관성 있고 좋은 듯 합니다!

      Liken

Kommentar verfassen

Trage deine Daten unten ein oder klicke ein Icon um dich einzuloggen:

WordPress.com-Logo

Du kommentierst mit Deinem WordPress.com-Konto. Abmelden /  Ändern )

Google Foto

Du kommentierst mit Deinem Google-Konto. Abmelden /  Ändern )

Twitter-Bild

Du kommentierst mit Deinem Twitter-Konto. Abmelden /  Ändern )

Facebook-Foto

Du kommentierst mit Deinem Facebook-Konto. Abmelden /  Ändern )

Verbinde mit %s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