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찬찬히 기존 번역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동서해적사의 번역은 정말로 의미 있다고 여겨질 때만 같이 감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모토
모토의 번역은 까다롭다. 나도 처음에는 이 모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굉장히 시적인 문장이라서 생략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잘 사용한 모토라는 생각이 든다.
Motto: …und alles, was man weiß, nicht bloß rauschen und brausen gehört hat, läßt sich in drei Worten sagen. (Kürnberger)
퀴른베르거는 지금은 거의 잊혀진 오스트리아의 작가다. 이 말은 극중인물의 대사로, 고대의 예술과 현대의 예술을 두 개의 개념으로 나누어서 간명하게 설명해버리는 대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기존 번역을 비교해보자.
이영철 역
…그리고 우리들이 아는 모든 것, 단지 왕왕거리고 웅웅거리는 소리로 들리지 않은 모든 것은 세 낱말로 말해질 수 있다.
곽강제 역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아는 것은 무엇이든, 그러니까 어디서 주워들은 걸 그저 조잘대거나 왕왕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단 세 마디로 족히 말할 수 있다.
곽강제 판본에서 “모토”가 아니고 “좌우명”이라고 되어있는 것은 오역에 가깝다. 이것은 책을 이끄는 모티프가 되는 말이지, 저자의 좌우명이 아니다. 아무튼 이것은 책의 내용과 잘 이어지는 모토로, “아는 것은 간명하게 말할 수 있다”라는 뜻인데, 내용은 일단 둘 다 비슷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표현과 문체의 문제로 접어든다.
어려운 번역은 rauschen und brausen이라는 표현이다. rauschen은 우리말에서는 쏴아- 라는 의성어로 표현되는 소리다. 주로 물결이 흐를 때 쓰지만, 숲에 바람이 불어와서 잎사귀들이 맞부딪치는 그런 소리도 rauschen이라고 부른다. 슈만의 가곡 호두나무Nussbaum의 마지막 소절은 es rauscht die Nacht… 라는 말로 끝나는데, 이것은 밤중에 온갖 소리가 고요하게 들려오는 것, 그러니까 정적에 가까운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brausen은 좀 더 활용빈도가 낮은데, 내가 아는 용례들은 대부분 물의 움직임에 관련한 것들로, 기본적으로는 rauschen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독일제 “발포”비타민제의 “발포” 부분에 해당되기도 하는 말이다.)
rauschen und brausen은 특정한 소리를 감별해낼 수 없는 상태다. “대충 지나가는 소리로 들은 것이 아니라면” 이라고 의역될 수가 있다. 이것을 우리말에서 똑같이 의성어로 잡아 내는가,에 번역의 포인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역자 모두 이 길을 선택했다. 이영철 선생님은 이것은 “왕왕거리고 웅웅거리는”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아마도 brausen의 사전설명에 “귀에서 울리는 소리”을 가리킨다는 말이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어감이 독일어의 그것과 대단히 멀다. 왕왕/웅웅은 좁은 공간에서 (기계적인) 무언가가 울리는 느낌이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brummen에 해당한다. rauschen und brausen은 변별할 수 없는 (자연적) 소음이 스쳐 지나간다는 데에 그 핵심어감이 있다. 곽강제 선생님은 “그저 조잘대거나 왕왕대는 것이 아니라”라고 번역했다. 조잘대는 것은 의인화가 되었고, 누군가가 말한다는 함의가 있다. 왕왕대는 것은 이렇게 보니 개가 짖는 소리라는 느낌도 든다. 의성어로 번역하는 게 우리말에서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 그것은 rauschen und brausen이 워낙 관용적이고, 또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수사적으로 보면 두 번을 다른 단어를 썼지만, 사실 하나의 대상을 말한 것이다.
게다가 곽강제 선생님의 번역은 “그러니까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을 그저 조잘대거나 왕왕대는 것이 아니라면”으로 옮겼는데, 그러면 rauschen und brausen의 주체가 필연적으로 사람이 되며, 불완전한 지식이라는 속성(“주워들은 것”)도 그 전달자에게로 넘어간다. 이러한 독법은 nicht bloß 다음에 jemanden이 생략된 것으로 본 것인데, 그렇게 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적합하지 않다. 이 번역의 또다른 큰 단점은, 너무 길어서 모토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리듬상 굳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이영철 선생님의 번역이 원문의 간결함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웅웅과 왕왕의 실패한 어감을 감안하면) 그러나 여기서도 “세 낱말로 말해질 수 있다”의 수동태를 직역한 것이 안타깝다. 이것은 그냥 “세 낱말로 말할 수 있다”라고 옮겨야 좋은 번역이 된다. 마찬가지로 앞의 부분도 “우리들이 아는 모든 것”으로 원문의 문장구조를 베낄 필요가 없다. 모토인 만큼 문학적 간결함을 최대한 높이는 방향으로 재편성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번역해보았다.
…그러니 그저 휩쓸리거나 들끓는 소리로 들은 것이 아니라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단 세 마디면 말할 수가 있다.
앞의 “우리들이 아는 모든 것”에 상응하는 구절을 여기에서는 아예 생략해버렸다. “그리고”와 “그러니”는 둘 다 순접이지만 퀴른베르거의 원문에서 이 앞에 나온 내용을 감안하여 바꾸었다. 왕왕, 조잘, 웅웅 같은 의성어는, rauschen, brausen과 이미지가 비슷하며 공기나 물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바꾸었다. 왕왕과 웅웅의 실패는 사실 발음상에서 강세가 두 개씩 총 네 개가 찍혀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rAuschen und brAusen으로 전체 강세 수가 2개인 점도 감안해서 좀 더 “흘러가는 듯한” 리듬감을 살려보았다.
2. 서문
서문에는 중대한 결함이 하나 있다. 이것은 영역본을 기초로 삼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이기 때문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단을 보자:
Wenn diese Arbeit einen Wert hat, so besteht er in zweierlei. Erstens darin, daß in ihr Gedanken ausgedrückt sind, und dieser Wert wird um so größer sein, je besser die Gedanken ausgedrückt sind. Je mehr der Nagel auf den Kopf getroffen ist. – Hier bin ich mir bewußt, weit hinter dem Möglichen zurückgeblieben zu sein.
놀라운 일이지만,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장 “Je mehr der Nagel auf den Kopf getroffen ist.”을 번역본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곽강제 선생의 번역에서 이 문장은 완전히 의역외어서 “– 핵심이 더 정확하게 표현되면 그럴수록 –” 이라는 삽입절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비유하자면] 못의 머리에 망치가 적중한 횟수가 많을수록 말이다”라고 옮겨야 한다. 혹시 참고한 영역본에 이 문장이 빠져있어서였을까? 하지만 확인해보니 1922년 영문 초판에는 틀림없이 “The more the nail has been hit on the head.”라는 문장이 들어있다.
이영철 역
이 작업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면, 그것은 두 가지 점에 있다. 첫째로, 이 작업 속에는 사고들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가치는 그 사고들이 더 잘 표현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 커질 것이다. – 여기서 나는 가능한 수준에 훨씬 못 미침을 자각하고 있다.
곽강제 역
만일 이 책이 무언가 가치를 갖고 있다면, 그 가치는 다음 두 가지 사실에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이 책에 생각들이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인데, 이 표현 문제에 관해서는 생각들이 더 잘 표현되면 그럴수록 – 핵심이 더 정확하게 표현되면 그럴수록 – 그 가치가 커질 것이다. 나는 내 표현이 가능한 최선의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문장은 비트겐슈타인의 집필 작업의 원동력이 되었던 예술가적 완벽성을 나타내는 문장으로, 문체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하는 Gottfried Gabriel의 논문 “문학적 형식과 철학적 방법Literarische Form und Philosophische Methode”의 부제로 쓰이기도 했었다. 서문에서 가장 비유적인 어법을 사용하고 있는, 거의 문학적인 이 문장이 누락되어 있는 것은 우연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중이든 의도했든, 분석철학의 좁은 프레임에서 갇힌 채로 이 작품을 읽으려는 사람은 이러한 문장에 무심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후기철학과의 통일성을 직관하고, 비트겐슈타인을 한명의 논리-철“학자”가 아니라 예술가로, 구도자로, 진짜 의미에서의 “철학자”로 보려고 노력한다면, 바로 이런 문장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작업에 어떠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두 가지가 될 것이다. 첫째로는 여기에 생각들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으로, 생각들이 잘 표현되었을수록 그 가치는 더 클 것이다. [비유하자면] 못의 머리에 망치가 적중한 횟수가 많을수록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내가 가능한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박술 역)
위에 인용한 번역문을 보면 (모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영철 선생님의 번역에 비해서 곽강제 선생님의 번역은 대단히 장황한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 볼 때 더 문장이 부드럽다고 느껴졌던 것은, 사실은 원문에 없는 정보를 덧붙이거나, 여러 문법적 장치들로 보완하여 원문이해의 결함을 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난다. 논리철학논고의 가장 큰 아름다움인 간결함과 명료함, 이 두 가지 미덕은 지나친 윤문이나 “국문화”를 통해서 훼손되는 것이 아닐까?
유명한 문장을 하나만 더 보자.
was sich überhaupt sagen lässt, lässt sich klar sagen; und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
이것은 책의 내용을 두 줄로 요약해 놓은, 수많은 인용의 대상이 되는 기념비적인 문장이다.
이영철 역
무릇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
곽강제 역
누구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누구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말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서문만 보아서는 책세상 판본은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려고 했음을 느낄 수가 있다. 그 부작용이 세미콜론“;”의 잔류와, 부자연스러운 수동태 등으로 나타나서 결과적으로 우리말 텍스트를 흐리고는 있으나, 이 충실함은 귀중한 것이다. 서광사 판본은 이 아름다운, 명확함의 극한까지 밀어붙인 문장을 마치 어린아이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듯이, 천천히 풀어쓰고 있다. 책세상 번역의 문제가 우리말의 어색함이라면, 후자의 문제는 부정확함에 있는 것이다. “누구나”와 같은 주어로 문장을 여는 것 자체가, 이 문장이 고도로 압축되고 잘 설계된 예술작품과도 같은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첫 문장에는 원래 주어가 없다). 또한 세미콜론 다음의 “und”를 “그러니까”로 읽는 것도 문장의 맛을 완전히 망쳐버린다. 마치 첫문장에서 두 번째 문장이 연역되는 듯한, 이 지저분한 느낌. 독일어의 “muss”는 원문에서 또 얼마나 강렬한가! 그것은 절대적인 금지의 억양이다. 그런데 “말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와 같은 훈계조라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하나의 수정같은 인격체가 흐믈흐믈 녹아서 땅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는 이렇게 물렁한 사람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박술 역)
이런 미니멀한 번역을 보고 혹자는 sagen과 sprechen의 차이를 말하다/이야기하다로 나누어야 하지 않느냐, 두 번째 문장에는 왜 주어가 없느냐, 이런 질문들을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반문할 수 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세계에서 sagen/sprechen의 유의미한 차이가 있느냐고(사실 그런 차이는 일상어에서도 없다). 여기서 테마화되는 것은 말하기/침묵하기의 윤리적인 차이지, 말하기의 여러 가지 방식들Modi에 대한 것이 아니다. sprechen은 단지 wovon을 받기 위해, 그리고 wovon은 또다시 darüber~schweigen을 받기 위해 문법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것을 그대로 옮기면서 우리말 번역의 명료함을 해치는 것보다는, 통일하는 것이 낫다. “man”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로, 이것은 그저 수동태를 대체하는 기능을 할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언어와 진리, 신비적인 것에 대한 전반의 금지와 허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Wovon wir nicht sprechen können…과 같은 문장을 쓰지 않은 것이다.
모토와 서문의 극히 일부분만 다루었는데도 이렇게 많은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드러나는 것은, 곽강제 선생의 판본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들었던 느낌, “이제 읽을만한 판본이 하나는 있구나”,가 틀렸다는 것이다. 많은 윤문을 통해 가독성이 높아진 것일 뿐, 실제로 문장 단위의 점검에서는 이영철 선생의 직역에 가까운 번역보다도 훨씬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간명하고 투명한 비트겐슈타인의 문체를 옮겨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작은 문제들과, 위에 언급한 중대한 문제들이 합쳐져서, 결국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의 이미지가 특정한 방향으로 왜곡된다고 생각된다. 특히 문장의 누락과 같은 문제는 전형적이면서도 충격적이다.
지금은 일기번역에 집중하고 있기에, 논리철학논고의 번역비평을 이런식으로 자세하게 끝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은 내가 초역을 진행해둔 부분까지만, 천천히 때가 될 때마다 더 진행할 예정이다.
퀴른베르거의 인용은 극중 인물의 대사가 아니라 신문 기고문에서 가져온 것 같습니다.
https://archive.org/stream/literarischeherz00kr#page/340/mode/2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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