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2007년 여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친구가 건네준 주어캄프 출판사의 붉은색 문고판 책을 처음으로 열었고, 그 후로 몇 년 동안 내 정신을 지배하게 될 하나의 문장을 보게 되었다.
1 Die Welt ist alles, was der Fall ist.
너무나 쉬운 문장이었다. 허나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몇 번을 거듭해서 읽어봐도 나는 이 단순한 구문에서 아무런 정보도 얻어낼 수가 없었다. 그저 무언가로 호되게 얻어맞은 듯 했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한 재료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가장 총체적인, 금강석같은 문장. 진리란 이런 것인가? 하는 느낌이 머릿속에서 전해져왔다.
이때의 느낌은 니체의 용암같은 문체에 취할 때와는 다른 경험이었다. 니체의 글에 읽는 이를 상승시키고, 주위의 다른 모든 것들을 하찮은 미물들로 만들어버리고, 신적인 것에 접한다는 환상을 일으키는 주술적인 힘이 있었다면 – 한마디로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비구름 같았다면 – 비트겐슈타인의 글에는 독자를 정화시키고, 낮추어, 마치 거칠고 깨끗한 천을 몸에 두른 듯이 몸가짐을 가다듬게 하는 제례적인 면모가 있었다. 저기에서는 파괴의 신이 진노하고 있다면, 여기에서는 불타는 눈을 한 구도자가 말하고 있었다. 아니, 말이 아니라 침묵에 가까운 문장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나는 그 후로 몇 년을 그의 사유와 삶을 이해하는 데에 할애했다. 대학철학의 무겁고 눅눅한 공기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유일한 빛이었다. 나는 로티 세미나에서도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논문을 썼고, 낭만주의 문학 세미나에서도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논문을 썼고, 오로지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수학과에 발을 들였다. 「논고」를 읽는 모임을 두 번이나 진행했다. 저 첫 문장의 의미를 알게 되고, 깊게 생각할수록, 나는 한국어 번역이 궁금해졌다. 번역은, 불가능해보였다.
이영철 역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곽강제 역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경우들 전체다.
동서문화사 판본(노야 시게키 역)
세계는 성립되어 있는 사항들의 총체이다.
분석을 진행하기에 앞서 말하면, 가장 내용적으로 정확한 것은 노야 시게키의 번역이고, 문체적으로 가장 근접한 것은 이영철 선생의 번역이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곽강제 선생의 번역은 오역이다. (첫인상과 달리, 자세하게 조사할수록 곽강제 선생의 번역이 점수를 잃고 있다)
아쉽지만, 이 문장에 있어서만큼은 기존 번역을 차근차근 비판하는 것보다, 직접 하나의 번역을 만들어 보는 것이 더 빠른 접근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하다보면, 왜 이 세 가지의 번역을 모두 거부해야 하는지 확실해지리라 생각한다.
첫 문장을 이해하려면, 왜 이렇게 쉬운 문장이 이토록 수수께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Die Welt ist alles, 이 부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것은 한국어에서는 완성된 번역문이 “세계는 ~ 한 모든 것이다(총체다, 전체다)”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만을 알려준다. 쉼표 뒤의 문장이 문제의 핵심이다. ‘was der Fall ist’은 대체 무슨 표현인가?
처음 이 문장을 번역하려는 사람은 Fall이라는 단어를 “경우”라고 옮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리고 서광사 판본은 이 유혹에 저항하지 못했다). 실제로 독일어로 Fall의 첫 번째 의미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In diesem Fall.. 은 “이런 경우에는..”이라는 뜻이고, Falls…로 시작하는 구문은 “…인 경우에는”으로 옮기면 적절하다. 영어의 case나 불어의 cas에도 거의 유사한 용법들이 주를 이룬다. 어원적으로는 라틴어의 casus, 즉 문법적 격(주격, 목적격등)을 표시하는 단어에서 왔다고 보인다.
하지만 독일어의 “der Fall sein”의 용법은 미묘하게 다르다. 독일어 내에서는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지만, 번역을 해보면 여기에서는 “경우”의 어감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찾는 물건이 없다고요?라는 질문에 점원이 “Leider ist das der Fall”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안타깝게도, 그런 경우입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라고 옮기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그렇다”에 아주 가까운 용법이다. 첫 번째 시도를 해보자.
세계는, 그러한 모든 것이다.
원문의 수수께끼 같은, 압축적인 느낌은 이 번역을 통해서 어느 정도 살아난다. 하지만 첫 문장의 파괴력은, 독자가 이 금강처럼 단단한 문장과 맞서 싸우는 기나긴 해석과 이해의 시간 동안에, 수수께끼였던 문장이 서서히 동어반복으로 변해간다는 데에 있다. 이해를 끝마친 독자는 첫 문장을 다시 보고서, “당연하지, 너무도 당연하지!”라고 말할 뿐이다. 어떤 비밀도, 대단한 진리도 없다. 그냥 당연함이 있을 뿐이다. 세계는 당연히 ‘alles, was der Fall ist’일 뿐이다. 왜냐하면 세계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먼 길을 돌아와서, 여정을 떠났던 집 안에 다시 서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다른 집이다. 그것은 물론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는 변했기도 하고 전혀 변하지 않았기도 하다. 바로 변함과 일관됨의 차이가 홀연히 소실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핵심 경험이다. 지금까지 믿고 의지했던, 그러면서도 절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진리”라는 것에 대한 질문이 사라지는 경험이며, 사다리를 집어던진 자가, 원래부터 사다리 따위는 필요 없었음을 문득 알아차리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에 빠져있던 나에게 친구들이 “그 책은 무슨 내용이니?”라고 물어보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어떤 내용에 관한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먼 거리에서 바라본 「논고」의 모습이고, 여기서 나는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책을 표현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여정을 발동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논고」의 첫 문장은 정말로 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힘을 번역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의도되었든, 작가 비트겐슈타인의 완벽주의에서 기인한 반우연적인 산물이든, 내 스스로 간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는, 그러한 모든 것이다.”라는 문장에 이만큼의 힘을 실을 수 있는가? 과연 이것은 수정과 같이 투명한 표현인가?
“그러한”이라는 표현은 역시 애매하다. “그러한”은 독어로 치면 so에 해당할 텐데, 물론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하는 보편명제형식 “Es verhält sich so und so(실상이 이러이러하다)”을 기억나게 한다. 그러니 포괄성과 보편성에 있어서 “그러한”은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Fall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의 특수성은, 어근인 fallen(떨어지다)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정성과 명확성의 뉘앙스를 추가한다. “Ist das der Fall, oder nicht?” (그렇다는 겁니까, 아니라는 겁니까?)은 단순히 “Ist das so, oder nicht?”과 비교했을 때, 말하자면 더 “공무원적”이며,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형식성이 부여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실제로, 「논고」의 체계는 예/아니오, 또는 진리/거짓으로 답변할 수 있는 명제들(그리고 거기에 대응하는 사실들)로만 이루어진 언어와 실체의 체계다. 모든 가능성은 실현되거나, 실현되지 않았어야 한다. 모든 것은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다. 진리이거나, 거짓이다. 중간은 없다. 바로 이러한 생각의 경향을 가장 극단까지 보편화시킨 것이 첫 번째 문장이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 또는 이가논리를 “세계는, 그러한 모든 것이다”라는 문장은 담아내고 있는가?
한국어 안에는 이분법적/이가논리zweiwertige Logik적 사고가 깊게 스며들어있지 않다. 언어구조 자체가 그러하다. 그렇다/아니다의 구분은 ja/nein의 차이와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긴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해”라는 반론이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 한국어다. 반면 (실제로도 많이 쓰는)“ja, und nein” 또는 “jain”(“예니오”)은 그 자체로 모순임이 너무나 드러나는 답이며, 때로는 도덕적 질타의 대상이 된다. 이가논리가 과연 인도게르만어의 특성에서 승화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어학적, 문화학적 논의가 있겠지만, 번역에 있어서 우리가 가지는 관심은, 과연 언어 내에 이미 존재하는 그러한 갈등과 편견들을 번역 안에 탑재할 수 있는가이다. 이가논리적 국면을 좀 더 강조하자면, 이러한 번역을 얻을 수 있다.
세계는, [그렇지 않을 수 있으나] 그러한 모든 것이다.
음, 뜻은 그럭저럭 맞는다. 그렇지 않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그러한 것들, 그것의 총체가 곧 세계다. 무수한 가능성들 가운데에서, 사실들의 우연한 배치로 인해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난 것, 그것이 곧 세계다. 내가 그저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의 산물, 현상으로서 내게 주어지는 실재, 그것이 곧 세계다. 나쁘지 않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물론 []를 사용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미적인 단점이다. 위대한 책의 첫 문장에 괄호를 넣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조금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런 번역은 어떤가?
세계는 판가름 난 모든 것이다.
나처럼 독일에서 자란(나보다도 2년을 더 빨리 독일에 갔던) 친구는 이 번역이 가장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키에르케고르!) 판가름이 난 것들, 그런 모든 것이 세계를 이룬다. 애초에 세계의 특성은 그 구성요소들이 판가름이 난다는 데에 있다. 예/아니오가 정해지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세계의 일부가 될 수가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비트겐슈타인은 윤리도 미학도 “초월적”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만이 언어에 포함되고, 마찬가지로 세계를 반영한다. 세계는 명확하게 특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가름”은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직 판가름이 나지 않았다”라는 용법의 지배를 너무 강력하게 받는다. 진리/거짓의 이분법을 보여주기는 하나, 극단까지는 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너무 사용빈도가 낮은 말이라는 단점이 있다. 「논고」의 첫 문장의 묘미 중 하나는, 매일매일 쓰는 지극히 평범한 단어들을 모아서 가장 큰 수수께끼를 주조했다는 데에 있다.
여기까지가 지난 몇 년간, 그러니까 일기번역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생각했던 것들이다. 물론 폐기된 번역으로는
세계는 성립하는 모든 경우들이다.
와 같이 평이하고, 노야 시게키(동서문화사)의 번역에 가까운 것들도 많이 있었다. (정말 여러 가지 번역을 시도해 보았다. 여기에 전부 나열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요즘 일기번역 작업을 하면서 물망에 오른 또다른 번역을 소개하기 전에, 기존 판본들의 번역에 대한 짧은 분석을 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왜 곽강제 선생의 번역을 오역이라고 불렀는지 해명하도록 하겠다.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경우들 전체다’는, 바로 위의 번역제안을 참고하면 알 수 있겠지만, 가능성에 대한 내용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논고」의 체계에서 ‘세계’는 ‘가능한’ 모든 경우들에 대한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논리 공간der logische Raum’이다. ‘세계’는 대상들의 조합가능성과 그 성립가능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가능세계들 중에서, 실제로 성립하는 단 하나의 세계를 부르는 이름이다. (‘우리 세계’ 또는 비트겐슈타인이 좋아하는 표현을 빌어 ‘나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면에서, 지금 이 세계는 순수한 가능성의 공간인 ‘논리 공간’에 비하면 극도로 편협한 공간이다. 이러한 중요한 차이를 표시하지 않았으므로, 곽강제 선생의 번역은 안타깝지만 감히 오역이라고 불러야 한다.
곽강제 선생의 번역을 가지고는 바로 다음 문장인 1.1 조차 읽어낼 수가 없다. ‘세계는 사실들 전체이지 사물들 전체가 아니다.’ 세계는 모든 가능성의 총체인데, 사실들 전체라니, 그렇다면 ‘사실’은 ‘가능성’과 같은 것이 된다! 이것은 Actus 와 Potentia의 아주 근본적인 차이를 무시하는 번역으로, 첫 문장부터 대단한 오독으로 이끌고 있다.
노야 시게키의 번역은 내용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지만 문체적으로 부적합하다. 그리고 사실상 위에서 말한 대로 “내용”이라 부를게 없는 이 책에서, 이것은 너무나도 큰 단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첫 번째 문장을 이 번역의 재번역에 해당할 “Die Welt ist die Gesamtheit der bestehenden Sachverhalte”라고 썼다면, 아마도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영철 선생의 번역은 애를 쓴 티가 아주 많이 난다. 처음에는 이 번역을 보고 어리둥절했었지만(‘이게 그 문장이라고?’), 내 자신이 비트겐슈타인 번역에 대한 고민을 몇 달째 하다 보니, 이 문장을 쓰려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을까 느껴진다. 원문의 함축성을 살리고자 과감하게 ‘총체’, ‘성립’, ‘사항’, ‘경우’와 같은 모든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신선한 표현으로 위에서 묘사한 충격적인 독서경험도 어느 정도 옮기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일상어를 일상어로 옮겼다. 하지만, 그래도 정말 좋은 번역이 되기 위해서 통과해야할 관문이 있고, 내가 볼 때는 결정적인 기준에 부합하지는 못한다. 왜 그런지를 이해하려면 첫 문장에 딸린 주석을 보아야 한다.
(옮긴이주) ‘일어나는 모든 것’ = ‘alles, was der Fall ist’, 영어 번역은 ‘all that is the case’. 불어 번역은 ‘tout ce qui arrive’. 특정한 시점에서는 (사실들의 총체로서의) 세계는 그때까지 ‘일어난’ 모든 것일 것이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를 영원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6.45 참조), 따라서 이에 맞춰 번역한다.
주석의 설명은 그 자체로 뭔가 불만족스럽다. 왜 첫 번째 문장에 대한 주석에서,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뒤에서 9번째 지적인) 6.45를 끌어와야 할까?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를 영원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가 핵심논증인 것 같은데, 이렇게 불확실한 언사로 이토록 중대한 문장의 번역을 뒷받침하려는 것인가?
자신의 고유한 해석은 번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원동력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하기도 한 양날의 검이다. 나 역시 “명제”나 “사태”를 “문장”/“사실관계”로 바꾸어 읽으려는 나 자신의 해석의 유혹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데, 그것에 무작정 굴복한다면 나쁜 번역이 되기 십상일 것이다. 내 해석체계를 떠나서도 객관적 논증이 가능한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첫 번째 문장을 6.45와 연관 지어서 읽는 것은 대단히 독창적인 독법이며, 두 문장 사이의 거리를 고려해보면 그리 초심자에게 친절한 해석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번역은 ‘비트겐슈타인이 정말로 영원의 관점에서 이 책의 모든 문장들을 썼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을 때만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나라면 이렇게 위험천만한 결정은 피할 것이다. 이것은 증명하기도 너무 어려운 명제일뿐더러, 그렇다고 반증을 하기에도 너무 모호하다. 즉, 일종의 면역성을 띤 논증인데, 그럴 때에 수준 높은 독자는 이 결정 자체를 솔직하지 못한 전략으로 무시해버리려는 욕망을 느낄 것이다. 이영철 선생의 노력은 훌륭했다고 판단하지만, 그것은 독자에게 와 닿는 방식으로 정당화되지 못했다. (나는 영원의 관점에 대한 해석과 “일어나다”라는 동사에 대해서도 몇가지 이의가 있지만,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가장 단순한, 가장 원초적인,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동어반복적인, 그러한 표현은 없을까? 첫 문장에서 동어반복적(암호적) 효과를 창출하는, 뒷부분에서 관계대명사 was를 이용해서 주문장의 alles를 받은 것에 주목해보자. 아니, 그보다 관계대명사 형식 일반에 주목해보는 것이 좋겠다. 예컨대 “es ist unbestritten, dass er der beste Lehrer ist”는 “그가 최고의 선생이라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로 번역이 될 텐데, 여기에서 관계대명사절의 문법적 요소인 dass…ist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말의 ‘사실’이라는 단어다. 즉 비트겐슈타인이 원하는 명제의 반영적인 성격, ‘무엇이 어떠어떠하다’를 우리말에서는 별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사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더 보편적으로는 ‘~는 것’, ‘~는 점’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번역에 사용할 수가 없다) “사실”이라는 단어가 「논고」에서 차지하는 개념적 무게를 생각해보면, 왜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딱 들어맞는 역어다. 언어 간에 성립하는 이러한 (우연한?) 철학적 일치는 드물고, 발견하기가 어렵다.
세계는 사실인 모든 것이다.
이제는 상당히 근접한 것 같다. 단번에 관통할 수 없으면서도, 전체를 이해하고 보면 무의미하다. 그리고 일상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짧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언어 간의 철학적 일치라고 불렀던 사항이 바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사실”이라는 개념과 중복이 되는 역어기 때문이다. 이대로 한다면 첫 부분은 이렇게 된다.
1 세계는 사실인 모든 것이다.
1.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며,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아, 안타깝다. 생각해보면 독일어에는 “사실”을 가리키면서도 중복의 여지를 피할 수 있는 말이 참 많다. Sachverhalt, Sachlage, Tatbestand, was der Fall ist, Tatsache, Fakt, wie es sich verhält, wie es steht, 등등.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언어적 특징으로, 독어와 한국어 사이의 비대칭성은 이러한 표현에서 극대화된다고 하겠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아직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역어만 더 고찰해보자. 우리말에는 실상實相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직역하면 Sachverhalt와 의미소 단위의 상응을 이루는, 훌륭한 잠재력을 보유한 역어다. 그리고 불교철학용어로 오래 동안 쓰인 역사성도 있다. 이것을 was der Fall ist나, Tatsache(사실), Sachverhalt(사태) 중에 하나의 역어로 사용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문제를 비껴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이다.
이제 첫 문장의 번역을 고민하기 시작한지도 5년은 족히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일기에서는 「논고」 첫 문장의 완성형태가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이 문장은 전쟁초기가 아니라 1916년 이후의 최종집필 과정에서 추가된 문장일 확률이 높다. 그만큼, 이 문장의 번역도 「논고」의 번역이 끝날 즈음에야 결정될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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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글을 읽어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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