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 블루메에게
– 쿠르트 슈비터스
오, 내 스물일곱 감각의 연인이여, 나는 너에게 사랑하네!
너는 너의 너를 너에게, 내가 너에게, 너는 나에게. – 우리가?
그건 (덧붙이자면)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지.
너는 누구인가, 셀 수 없는 여인이여? 너는 누구 – 누구 너는?
사람들은 네가 있을거라고, 그렇게 말하지 – 맘대로 말하라고 해, 그들 그들은 모르지, 교회탑이 어떻게 우뚝 섰는지를.
너는 두 발 위에 모자를 쓰고, 두 손으로 걸어다니지, 두 손으로 너는 걸어다니지.
안녕 네 빨간 드레스, 흰 주름이 갈기갈기. 아나 블루메를 나는 빨갛게 사랑하네, 빨갛게 너에게 사랑해! – 너는 너의 너를 너에게, 너는 나에게. – 우리가?
그건 (덧붙이자면) 꺼진 불 속에 던져넣을 이야기지.
빨간 꽃, 빨간 아나 블루메, 사람들이 뭐라고 하더라?
문제 나갑니다:
1. 아나 블루메는 새가 한 마리 있다.
2. 아나 블루메는 빨갛다.
3. 새는 무슨 색깔인가?
네 금빛 머리칼의 색은 푸른색.
네 초록 새의 목소리는 빨간색.
일상복을 입은 평범한 소녀야, 사랑스러운 초록 짐승아, 나는 너에게 사랑하네! – 너는 너의 너를 너에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 우리가?
그건 (덧붙이자면) 잿더미 속에 던져넣을 이야기지.
아나 블루메! 아나, a-n-n-a 나는 네 이름을 뚝뚝 흘리네. 너의 이름이 연한 쇠기름처럼 뚝뚝 떨어지네.
알고 있니 아나, 너는 알고 있니?
너의 이름은 뒤로도 읽을 수가 있지, 그리고 너, 가장 대단한 너, 너는 뒤에서 봐도 앞에서 봐도 똑같지: „a-n-n-a“.
쇠기름을 뚝뚝 흘린다 내 등을 쓰다듬는다.
아나 블루메, 착한 짐승아, 나는 너에게 사랑하네!
(1919)

이번 낭독회의 주제가 „놀고 읻다“로 정해졌기 때문에, 가장 유희스러운 시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쿠르트 슈비터스의 „아나 블루메“를 골랐다. 다다이즘의 고전! 이런 시가 96년 전에 이미 쓰였고 또 다다이즘이라는 움직임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
이 시는 독일어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워낙 널리 알려져있지만, 오늘날에도 소리내어 읽어보면 참 즐겁다. 다다는 기본적으로 재미있다. 다다, 다다! „다다“만 여러번 반복해도 유쾌해지고, 머리가 약간 텅 비는 느낌이 든다.
구어체로 자연스럽게 쓴 글이어서 번역은 쉬운 편이었으나, 몇 가지 난점이 있었다.
4행의 ungezähltes Frauenzimmer: 여인이라는 뜻의 Frauenzimmer라는 단어를 이용한 언어유희다. Frauenzimmer는 말 그대로 여인이 머무르는 방이라는 뜻으로, 어원사전을 보면 15세기에 지체 높은 여인과 그녀에게 귀속되는 하녀들을 이렇게 둘러서 표현했다고 되어 있다. 16세기를 지나면서 개별적 여인을 지칭하는 말로 변화하였고,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조금 경멸조가 섞인 단어가 되었다. 근대 이후에 등장하면 대개 „여자들이 뭘 알아..“라고 말할때 쓸 법한 어조로 읽힌다. 그러한 어감의 변화 때문인지, 현대 독일어에서는 아예 사용되지 않는다. (아주 나이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해봐도, 실제로 사용되는 예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말로 치면 „안방마님“으로 부르다가, 언젠가부터 „안방“으로 이름이 바뀐 셈이다. 이 언어유희는 Zimmer부분을 „세어보지 못한“으로 수식하는데 그 포인트가 있다. 다다는 발칙하고, 다다는 조금 멍청하고, 다다는 어린아이같다. „그 수가 파악되지 않은 안방들이시어!“ 라고 옮기고 싶은 유혹이 있지만, 바로 이럴 때 참아야 한다..
kalte Glut와 Glutenkiste: 나는 전자를 곧바로 이글거리는 Glut(불꽃)을 반어법으로 쓴 것이라 생각했는데, Glutenkiste는 처음보는 단어여서 화로나, 난로의 재받이를 말한다고 추측하며 검색해보았다. 게시판에서 싸우는 독일인들 (…)을 지켜보니,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Gluten(접착용 풀)을 어원으로 추정하는 무리도 있었다. 이렇게 보면 전자는 식어서 굳어버린 풀, 후자는 풀통이 된다. 전형적인 연가의 패러디 형식이라고 하면, 정념의 불꽃으로서의 Glut를 반어법으로, 식어버린 잿더미로 놓는 것도 재미있지만, 뒤에 등장하는 „쇠기름“이라는 (상당히 관능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끈적한 풀이 더 어울리기도 한다. 한국어에서는 이 두가지를 모두 잡을수가 없었으므로, 원래의 직관대로 불의 이미지만 을 남겨두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읽을 수 있는 a-n-n-a는 처음에는 „ㅇ-ㅏ-ㄴ-ㅏ“로 옮기고 싶었는데, 타이포적으로도 너무 안 이쁘고, 결정적으로 뒤로 읽을 수가 없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서
마지막행의 tropfes Tier의 tropf는 „멍청하다“와 „착하다“의 의미가 둘다 들어있고, 그 위에서 계속 등장하던 흘리다, 방울지다의 tropfen, träufeln의 어근을 포함한 복잡한 문맥에 들어있다. 역시 다다니까 이렇게 맘대로 엮을 수 있구나, 생각도 든다. 아무튼 순하면서도 (앞의 문맥으로 인해 관능성을 획득했으므로) 일종의 백치미를 표현하는 단어가 된 것인데, 한국어에서는 „맹하다“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딱히 나쁜 말은 아니고, 약간 동물적으로 귀여운 어감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아무튼 여기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무난한 역어를 선택했다. 좀 기분은 좋지 않았다.
ㅂㅅ 씨 맞나요? 쿠르트 슈비터스 검색하니, 이런 우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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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아요 낭독회 끝나고 찾아보셨나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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