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 여행
로버트 발저 / 박술 역
선장, 신사, 어린 소녀, 이 세 사람이 바구니 안에 올라타자, 기구를 고정하는 줄의 단추들이 풀리고, 이 이상스러운 집은 마치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듯이, 망설이면서 천천히 위쪽을 향해 날아올랐다. “잘 다녀오시게!” 아래에 모인 사람들이 모자와 손수건을 펄럭이면서, 멀어져가는 기구를 향해 외쳤다. 여름 저녁의 10시다. 선장이 주머니에서 지도를 하나 끄집어내어, 신사분에게 함께 지도를 들여다보자고 권한다. 지도를 보며 풍경과 비교하자니, 눈이 닿는 곳마다 환하다. 만물은 거의 갈색에 가깝게 빛나고 있다. 예쁜 달밤이 화려한 기구를 보이지 않는 팔로 끌어안기라도 하는 듯, 기구의 둥근 윤곽은 살포시 위를 향해 날아오르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바람이 기구를 조용히 북쪽으로 밀어준다. 지도에 몰두하던 신사는 이따금씩 선장의 지시에 따라 모래 한줌을 기구 아래로 낙하시킨다. 선상에 있는 다섯 주머니의 모래는 아껴서 써야만 한다. 둥글고, 창백하고, 어두운 심연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친근한 달빛이 무언가를 알려주려는 듯, 강물의 자태를 은빛으로 드러낸다. 아래쪽에 보이는 집들은 너무도 조그맣고, 마치 죄 없는 장난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숲들은 어두운, 아주 오래된 노래 가락을 부르고 듯하지만, 그 노래는 고귀하고 고요한 지혜를 닮은 운율로 다가온다. 대지는 거대한 남자가 잠자는 모습을 닮았구나, 어린 소녀는 이런 꿈에 빠진 채로, 바구니 가장자리 너머로 어여쁜 손을 늘어뜨리고 있다. 무슨 변덕의 결과인지 신사분은 머리에 중세기사 같은 깃털 모자를 쓰고 있는데, 머리 장식만 빼면 꽤 세련된 옷을 입고 있다. 땅은 얼마나 고요한가! 모든 것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마을길을 걷는 사람들 하나 하나, 교회의 종탑, 하루 종일 일한 머슴이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마지못해 마당을 가로지르는 모습, 유령처럼 휙 지나쳐가는 기차, 눈부시게 희고 길게 이어진 시골길.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고통이 웅얼거리며 아래에서 올라오는 듯하다. 잃어버린 장소들에 감도는 외로움에는 특별한 음색이 있는 법이지만, 사람들은 이 특별한 무언가를 이해하고, 굳이 눈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엘베 강의 형상이 세 사람을 황홀한 눈부심으로 감싼다. 밤의 물줄기는 소녀에게서 그리움으로 가득찬 탄성을 앗아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소녀는 가져온 꽃다발에서 어둡고 화려한 장미 한 송이를 뽑아서, 반짝이는 물속으로 내던진다. 그러는 그녀의 눈동자는 얼마나 슬프게 빛나는지! 마치 이 어린 여인이 아픔으로 가득 찬 삶의 싸움들을 영영 아래로 내던져버린 느낌이다. 어떤 아픔과 이별하는 것은, 크나큰 고통이다. 그런데도 온 세상은 얼마나 조용한지! 멀리서 큰 마을의 불빛이 반짝이고, 선장은 전문가답게 도시의 이름을 불러준다. 아름답고 유혹스러운 심연이여!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숲들과 들판을 지나왔고, 이제 자정이 되었다. 지금 저 단단한 땅 위 어딘가에서는 자루를 멘 도둑이 살금살금, 남몰래 담을 넘고 있을테고, 저 아래 침대에 누워있을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토록 거대한 잠, 수백만이 자고 있는 잠이라니. 이제 온 지구는 꿈속에 빠져들고, 온 민족이 지친 몸을 자리에 뉘인다. 소녀가 살짝 웃는다. 얼마나 따스한지, 마치 고향집 같은 방에서 엄마, 이모, 누이, 형제나 아니면 애인 곁에 앉아서, 고요한 불빛 아래 아름답지만 조금은 지루한, 길고 긴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다. 소녀는 구경하다가 좀 지쳤는지 잠이 들려한다. 바구니 안에 서있는 남자 둘은 입을 다문 채 굳건하게 밤 속을 응시한다. 신비로운 흰색을 띤, 반짝이게 닦아놓은듯한 평원과 정원, 자그마한 야생덤불 따위가 엇갈리며 지나간다. 제 발로는 절대 찾아가지 않을 아래쪽의 장소들을 쳐다본다. 어떤 장소들, 아니 대부분의 장소들에서는 쓸모 있는 것을 찾아다닐 일이 없지 않은가. 이 커다란 지구를 우리는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깃털 모자를 쓴 신사가 생각한다. 여기 위쪽에서 아래를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비로소, 자신의 조국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이 얼마나 탐구되지 않은 나라인지, 얼마나 힘찬 나라인지 느낄 수가 있다. 날이 밝아올 때는 이미 두 개의 주州를 건넌 후였다. 아래 쪽 마을들에서는 다시 사람들의 삶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이 동네는 이름이 뭐요?” 선장이 아래를 향해 외친다. 소년의 밝은 목소리가 대답한다. 세 사람은 아직도 바라보는 중이다. 소녀도 이제 잠에서 깨어났다. 이제 색깔들이 드러나고, 사물들은 조금 더 분명해진다. 숲들 사이에 비밀스럽게 숨겨진 호수들의 스케치선 같은 윤곽이 보이고, 늙은 나무들의 잎사귀 사이로 옛 요새의 유적들이 솟아오른다. 거의 흔적도 없이 생겨나는 언덕들과, 물속에서 하얗게 몸을 떠는 백조들이 보이고, 사람들의 일상에서 들려오는 친근한 목소리가 점점 커져온다. 계속해서 날아가다 보니 드디어 장대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자 이 당당한 항성에 이끌린 듯, 기구는 마법처럼 어지러운 고도까지 단숨에 올라간다. 소녀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다. 남자들이 웃는다.
로버트 발저 (Robert Walser [1878-1956])는 스위스 태생의 문필가이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초기작인 Walter von Gunten발터 폰 군텐 정도가 번역되어 있는 것 같다.
발저는 산문의 대가이며, „이야기Erzählen“라는 장르를 재창조했다는 평가까지도 받는다. 그의 글은 내용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서사 없는 풍경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따스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가벼운 명랑함과 유머러스한 우울함이 배합된 교묘한 색채를 가졌다.
발저의 애독자 중에서는 헤세와 카프카가 있었으며, 당시에도 아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던,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였다.
(지금도 독일에서도 발저를 말하면 마틴 발저를 말하는 줄 알 때가 많은데, 참 재미없는 사람들이다.)
후기의 산문집들은 초기작보다 더 가볍고, 더 아름답다. 아무런 목적 없는 „기구여행“처럼, 글과 풍경 사이를 유영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발저는 1929년에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에, 생전에 그렇게나 사랑하던 횔덜린처럼, 오랜 여생을 광기를 벗 삼아 보냈다.
그는 1956년 겨울에 눈 속을 걷다가 죽었다. 위 글이 수록된 산문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인의 삶Poetenleben“은 그렇게 끝났다.
그가 죽은 후에, 여러가지 재료에 깨알 같은 연필 글씨로 쓴 한 무더기의 글들이 발견되어 „Mikrogram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의미한 암호, 광인의 글이라고 판단되었으나, 강력한 배율의 돋보기로 보자 어마어마하게 작게 쓴 산문들임이 밝혀졌다. 20년 간의 해독작업을 통해서 2,000페이지에 달하는 산문이 복구되었고, 출간되었다. 혹자는 발저가 „집필 속도를 극도로 늦추기 위해서“ 이러한 방식을 택했다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안녕하세요.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우연히 글을 읽고 이렇게 두서없이 댓글을 남긴 점, 죄송합니다. 로베르트 발저를 사랑하는 독자이자 편집자로서 책을 기획해 보고자 하는데요, 혹시 발저 작품 번역에 관심 있으신지요? 아무쪼록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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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Jude님, 제가 지금 다른 책을 번역하는 중이라 당장은 불가능하겠지만,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시는 것도 괜찮으시면 dolsool쥐메일.컴으로 메일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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