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때부터 가장 깊게 느껴왔던 질문은, 내가 문화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있다는 의식과 연관이 있었다.
사본의 사본을 보고있다는 인식, 나를 둘러싼 세계가 가짜라는 인식은 최초에는 한국-서양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었다.
„문화“라는 대상의 근원이 여기가 아니라 서구라는 사실은 우월감과 컴플렉스가 묘하게 혼합된 형태로 다가왔고, 내가 서양문화를 누구보다도 게걸스럽게 섭취하게했다.
어떤 의미에서, 변방자로서의 자기인식은 나를 급속하게 서구인으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자가 되었고, 자신을 주류 독일인으로 인식하는 기간동안 역설적으로 가장 많은 불안을 겪었다. 내가 학창시절부터 속했던 사회가 우연히 독일 귀족사회였기에 제대로 된 연대감이나 소속감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개인적인 운명에, 지금 와서는 감사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근대화=서구화의 공식에 따른 자기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지금은 그 사실을 비교적 편안하게 인정할 수 있다.
한국어로 시를 쓰는 행위는 세계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었다. 한국시는 그 자체로 깊게 현대화되어있어서, 서구적 정신으로 접근하기가 용이했다. 오히려 시라는 마이너한 장르가 나같이 길을 잃은 사람이 외계에서 들어오기에는 가장 폭넓은 문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때 여러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서 상당히 균열적이고 유연한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예술적인 활동에 적합한 마음이기도 했다.
이때는 지리적 차이라고 생각했던 중앙-변방의 관계를 언어적으로 치환하여 이해하려고 했던 시기였다.
번역이라는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시작했고, 마치 시쓰기에 그랬던 것처럼 번역에도 약간의 형이상학적 희망을 걸고 있었다.
(지금은 텍스트 생산이라는 행위 전반에 그렇게 큰 요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을 이질적인 세계들 사이의 매개자로 생각했고, 바닥없는 공간에서 부유하는 순전히 언어적인 실체로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한 형이상학적 희망(환상)에서 쓸 수 있었던 시가 예를 들면 „쟤네말“이었다.
나는 일종의 세계시민주의를 개인적 차원에서 실현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유목민“이라는 말에 위안을 얻던, 상당히 척박한 시기였다.
귀국 후에 그러한 환상이 사라지면서,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그 나름대로 뼈아픈 경험이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서 예술이라는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은, 세계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강력한 편견들을 표출하는 도구였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한 편견들은 내가 생존을 위해서 스스로 구축해놓은 것이었고, 그 자체로는 잘 갈아놓은 돌을 보석과 착각하는 그런 종류의 행위였다. 내가 처한 특수한 상황이 나의 시선을 아름답게 만들었을 뿐, 매순간 항상 아름답게 세상을 바라보기에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심약한 부분이 있었다.
나는 건강이라는 말을 바라보았다. 건강이라는 말을 바라보면서, 지혜라는 말을 떠올렸다.
철학과 문학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간이 끝나고 있었다.
„건강이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자기에게 해로운 것을 멀리하는 능력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떠올렸고,
삼선동에 얻은 작업실에서 대학내내 읽지 않던 니체를 다시 읽었고, 강인한 사고를 필요로 했던 연약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동시에 동양 고전어의 어감을 여러 갈래의 소재들로부터 섭취하면서, 서양 컴플렉스로부터 서서히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니 중앙-변방의 문제는 근대세계의 지리적 위상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명이 최고조에 다다르면 왜 몰락하는가’라는 시간적인 문제로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나는 두가지 의미로 몰락의 현장에 살고 있었다. 전통적 세계관이 조선말기의 퇴락을 겪으면서 와해된 결과물로서의 몰락과, 식민지와 전쟁역사를 겪으며 강제로 받아들인 서구근대문명이라는 프로그램 자체에 내재되어 있던 몰락의 씨앗이 무르익으며 몰락, 이렇게 중첩된 몰락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내가 흔히 말하는 몰락의 철학자들과 시인들을 사랑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서구문명을 퇴폐Decadence으로 바라본 니체, 기술문명의 언어적 귀결점을 침묵으로 파악한 비트겐슈타인, 그리스도교 신앙과 명료함이라는 이념이 결합한 결과물이 역설paradox이라고 간파한 키에르케고르. 이 세명의 공통점은 행위의 부재이며, 어떤 의미로 침묵을 긍정한다는 데에 있다(차라투스트라의 말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만, 아무도 위하지 않는다“). 이것은 철저히 고전주의적인 자세이기도 하고, 몰락을 몰락으로 받아들이는 숙명론적인 자세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사유에 있어서 모든 사회개혁적인 요소의 배제가 나의 감성과 공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한 결론점에 섰을때, 서구인으로서 나는 앞길이 막혀있었다. 역설이고 침묵이고 오만인 장소에 도달했지만, 그것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절망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동양인으로서의 나를 재발견하면서(이 말도 사실 정확하진 않다), 새로운 의미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인도-중국을 기반으로 하는 문명세계는 그러한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지 않았다는 직관을 얻게 되었고, 이것은 나의 새로운 물음이 되었다. „극단에 다다르지 않는 문명, 몰락하지 않는 문명이 존재하는가?“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어떤 철학을 가져야 하는가, 라는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현대에서 눈을 돌려야 하며, 고대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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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Überblick의 부재는 근대성의 지표다.
근대 철학자와 예술가의 특징은 현실을 미로로 파악하는 것에 있다.
철학을 예로 들어본다면, 명료성의 이상이 철학에 도입된 이후로 지혜가 발생할 확률은 매우 낮아졌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철저하고 엄격한 사유는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보여주었다.
유대적 그리스도교와 아리스토텔리즘의 모순적인 결합은 인간-신이라는 절대타자성의 구도를 만들었다. 이를 ‚신의 죽음’과 더불어 인간-자연으로 변환하고, 이어서 과학자-탐구대상의 도식으로 번역하는 것은 근대정신의 핵심적인 철학적 작업이었다. 이것을 „명료화“Klarwerden/Klären라고 부르기로 하자. 여기서 klar라는 말이 칸트의 핵심개념인 Aufklärung계몽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르네상스에 시작된 이성-프로그램의 후속작업임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언어와 세계를 명료함의 도식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 안에서 진리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진짜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만이 정당한 자세로 허용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유럽의 중심문명을 자기해체와 몰락의 노선으로 밀어넣은 명료함의 이념에 깊이 물들어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충실한 근대인인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길을 알지 못했고, 이 강력한 편견이 그의 철학적인 원동력이었다. 바디우는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을 증오했다’고 보며, 그런 점에서 그의 철학을 „반철학“이라고 평가한다. (나는 전자는 맞는 해석이지만, „반철학“의 개념은 대단히 자기모순적이고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명료함은 평등의 개념(논리적으로 말하면, 기호들과 연산들 사이의 동등성. 단순성)이나 자유의 개념(명제의 논리적 독립성)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실험적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평등과 자유의 개념의 기저에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명료함은 대상을 분석analysieren하지만, 분해zerlegen하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의 초고에서 두 가지 단어들을 혼용하는 것이 바로 그런것에 대한 지표가 아닐까) 대상을 해체하려는 것은 명료함의 문명이 가진 본질적인 특성이다. 이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에는 극도로 좋은 환경이지만, 그 이전까지 인류가 숭상했던 모든 가치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모든 노력은, 명료함의 도구를 가지고 불명료함을 재현하려한다는 점에서 절망적인 움직임이다. 나는 그것을 명료함의 이념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미로, 말하자면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한 미궁의 설계작업이라고 보고싶다. 이 싸움을 이끌어나가기에, „일상언어“라는 전장은 이상적이다. 근대적 분석성, 명료함의 기틀이 되는 것은 결국 서구어의 주술구조이며, 명사화에 적합한 문법적 구조이며, 선언문(„명제“)를 다른 문장들로부터 분리하기 용이한 언어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명료함의 기반이 되는 „최후의 전장“이 결국 일상언어라고 보았을때, 또 일상언어가 인간정신과 세계를 잇는 가장 심층적인 기저를 이룬다고 보았을때, 비트겐슈타인은 질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이길 수도 없다)
명료함은 환상이며, 편견이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인 모호함이나 불명료함이 진상이라고 보는 것 역시 환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명료함을 기본적인 인식도구로 장착한 현대인이 빠져들 수 있는 최적의 미로를 설계해놓고 있다. „철학적 탐구“는 환상을 환상으로 보는 방식을 가르치려는 훌륭하고 솔직하며 절망적인 노력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입으로 말했듯이, „장님들 가운데 있는 외눈박이 왕“이 빛에 대해서 설법을 하는 것과 같다.
명료함으로 명료함을 지우려는 경향은 예술에서도, 예를 들어 카프카의 산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러한 고도의 미로건축술은 길을 잃은 인간이 오히려 길이라는 개념을 소멸시키려하는 행위와도 연관이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