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탐구 89-133번 지적 번

<<철학적 탐구>>

§§89-133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박술 역

89. 이러한 고찰들과 더불어, 우리는 다음의 문제가 서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논리는 어떤 의미에서 숭고한 것인가?
이유인즉, 논리에는 어떤 특별한 깊이 – 보편적인 의미 – 가 부여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논리는 모든 학문의 기저에 놓여있다고, 그렇게 비춰졌다. – 논리적 관찰은 만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사물들의 기저를 보려고 하며, 실제 사건의 이렇고 저러함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이다. – 그것은 자연사건의 사실들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인과적 관계들을 파악하려는 욕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모든 경험적인 것의 기초, 아니 그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를 위해 새로운 사실들을 탐색하여 추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하려는 조사에 본질적인 것은, 이를 통해 어떤 새로운 것도 배우려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우리 눈 앞에 열려있는 어떤 것이다. 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보였던 그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참회록, 9/14):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내게 묻지 않으면,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설명하고자 하면, 알지 못한다.« – 자연과학의 물음에 대해서는 이와같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수소원자의 특정 질량을 묻는 물음이라면). 아무도 우리에게 묻지 않을 때는 알고 있지만, 설명하고자 하면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숙고besinnen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숙고하기가 명백하게 어려운 어떤 것이다.)

90. 우리가 받는 것은, 현상들을 꿰뚫어보아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탐구는 현상들이 아니라, 말하자면, 현상들의 ›가능성들‹을 향한다. 우리가 숙고한다 함은, 이에 따르면, 현상들에 대하여 우리가 행하는 발언의 종류에 대하여 숙고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티누스도 사람들이 사건의 기간이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행하는 다양한 발언들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시간,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철학적 발언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찰은 문법적 관찰이다. 이 관찰은 오해들을 소거함으로써, 우리 문제에 빛을 가져다준다. 이는 단어의 용법에 관련된 오해들로, 다른 이유들 외에도, 우리 언어의 상이한 영역들에서 나타나는 표현형태들 간의 특정한 유비들로 인해 야기된다. – 이 중 일부는 어떤 표현형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면 제거될 수도 있다. 이런 행위를 일컬어 우리 표현형태에 대한 »분석Analysieren«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니, 이 과정은 때때로 분해Zerlegen와 비슷한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91.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 언어형태들에 대한 최종적 분석’, 즉 ‘표현이 완벽하게 분해된 유일한 형태’ 따위가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통용하는 표현형태들이, 본질적으로는, 아직 분석되지 않았으며;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어서, 훤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난 뒤에야, 그 표현은 완벽하게 규명된 것이고, 우리의 과제는 해결된 것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오해를 제거하는 방식은, 우리의 표현을 더욱 정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상태, 완벽한 정확함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우리 탐구의 본래 목적인 것인 양 말이다.

92. 이것은 언어, 문장, 사고의 본질을 묻는 물음에서 표현된다. – 우리가 행하는 탐구에서 언어의 본질 – 그 기능과 구조 – 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그것은 이 물음이 안중에 두고 있는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물음은 본질에서 ‘이미 뻔히 드러나 있으며 정돈을 통해 일목요연해지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표면 아래에 놓인 어떤 것을 본다. 내면에 놓인 어떤 것, 우리가 대상을 꿰뚫어보아야 볼 수 있는 것, 분석을 통해서 파헤쳐야 하는 것 말이다.
›본질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이게 바로 우리 문제가 지금 취하는 형태다. 우리는 »언어란 대체 무엇인가?«, »문장이란 대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최종적이어야만 한다; 미래의 어떤 경험에도 구속되지 않아야 한다.

93. 누군가는 »하나의 문장, 그건 세상에서 제일로 평범한 것이지« 라고 말할 때,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나의 문장 – 그건 정말로 이상한 어떤 것이지!« – 이때 후자는, 문장들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그저 찾아보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우리 표현방식의 형태들이, 문장들과 사고에 관해서, 그의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는, 문장이 이상한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가? 한편으로는, 문장에 부여되는 엄청난 의미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옳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 의미와 언어논리의 오해에 유혹되어, 문장이란 뭔가 비정상적인 능력, 심지어 유일무이한 능력을 발휘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문장이 뭔가 이상스런 것을 행하는 양 비춰지는 것은, 오해에 의한 것이다.

94. ›문장이란 것은, 이상한 물건이야!‹: 재현 전체의 승화는 이 말 속에 이미 들어있다. 문장기호들과 사실들 사이의 순수한 중간존재를 상정하려는 경향. 또는, 문장기호 자체를 표백하고, 승화시키고 싶어하는 경향. – 만사는 보통의 물건들로 돌아간다는 것, 이 사실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표현방식들은 무수한 방식으로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로 하여금 키메라를 쫓아다니도록 만든다.

95. »사고思考란 유일무이한 어떤 것이 틀림없어.« 우리가 ‘사태가 이러저러하다’라고 말하거나, 뜻할 때, 이 의미하는 바를 가지고 ‘사실 앞의 어딘가’에서 멈춰서지는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이것 저것이 – 실제로 – 이러저러하다’고 뜻한다. – 이 역설을(이는 물론 당연함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고할 수 있다.

96. 여기 의미된 특별한 착각에, 여러 방향으로부터, 또 다른 착각들이 접합된다. ‘사고’와 ‘언어’는 이제 세계에 대한 유일무이한 상관相關이자, 영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문장‧언어‧사고‧세계라는 개념들은 한 줄로 죽 늘어서 있고, 모두 서로 등가적인 것들이 된다. (하지만 이런 단어들을 어디에 쓰려는가? 이들을 적용할 언어놀이가 없지 않은가).

97. ‘사고’는 하나의 후광[1]으로 둘러싸여 있다. – 그것의 본질, 즉 논리는, 하나의 질서를 나타내며, 이 질서는 세계의 선험적 질서, 즉 세계와 사고가 공유해야만 하는 가능성들의 질서다. 하지만 이 질서는 반드시 극도로 단순해야만 한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모든 경험 이전에 있으며; 경험 전반을 관통하며 퍼져있어야만 한다; 그것에는 조금의 경험스러운 탁함이나 불확실함도 달라붙어서는 안된다. – 그것은 반대로 가장 순수한 결정체Kristall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결정체는 하나의 추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것, 심지어는 가장 구체적인 것, 비유컨대 가장 단단한 것으로 나타난다. (논리철학논고 5.5563)
우리가 빠진 착각은, 우리 탐구의 특별한 점, 깊은 점, 우리에게 본질적인 점이 ‘언어의 비교불가능한 본질’을 포착하려는 시도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본질이란] 즉 문장‧단어‧추론‧진리‧경험 등의 개념들 사이에 성립하는 질서를 말한다. 이 질서는 – 말하자면 – 초-개념들 사이에 있는 하나의 초-질서라고 할 수 있다. »언어«, »경험«, »세계«와 같은 단어들도, 만일 이들에도 활용이 있다면, »탁자«, »등불«, »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저급한 활용이어야만 할텐데도 말이다.

[1. Nimbus는 후기 라틴어에서 차용된 말로, 본래 “안개”, “구름”이라는 의미에서 확장되어 “후광”, “아우라”라는 의미로 쓰였다. 여기에서는 빛과 안개, 명징함과 모호함의 이미지를 두루 갖춘 말로 선택되었다.]

98. 한편으로, 우리 언어의 모든 문장들이, ›있는 그대로도 질서롭다‹[2]는 것은 명료하다. 즉, 우리는 이상을 추구하고 있지 않다: 마치 우리가 가진 보통의, 모호한 문장들의 의미가 아직 온전히 무결한 것은 아니라거나, 완전한 언어는 우리에 의해 비로소 구축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양 말이다. – 다른 한편으로, 이것 역시 명료하다: 의미가 있는 곳에는, 완전한 의미도 있어야 한다. – 그러므로 완전한 질서는 가장 모호한 문장 속에도 들어있어야만 한다.

[2. In Ordnung sein은 구어체에서는 “괜찮다”, “정상이다”라는 아주 일상적인 의미로 쓰인다. 97번 지적에 나온 “초-질서”와 핵심단어 질서Ordnung을 공유하면서도, 그 함의를 역전시키고, 이 착각을 덮고 있는 형이상학적 거품을 단번에 빼낼 수 있는 용법을 선택한 것이다.]

99. 문장의 의미는 –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어한다 – 물론 이것저것을 열어둘 수 있지만, 그래도 문장은 하나의 특정한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불특정한 의미, – 그런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아니다. – 이 말은 마치 ‘예리하지 않은 경계선은, 사실상 아무런 경계선도 아니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예컨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그 남자를 방에 단단히 가둬놨지 – 문 하나가 열려있는 것을 빼면 말이야« – 그러면 나는 그를 전혀 가둬놓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는 겉보기에만 갇혀있을 뿐이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러니까 너는 아무일도 한게 아니야«라고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뭔가의] 둘레Umgrenzung에 구멍이 나있다면, 아무런 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하지만 이는 과연 진리인가?

100. »규칙에 모호함이 있다면, 그건 유희가 아니지.« – 하지만 그러면 실제로 유희가 아닌가? – »그래, 어쩌면 너는 그걸 유희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어쨌든간에 완벽한 유희는 아니지.« 이 말은 이런 뜻이다: 그런 경우에 유희는 불순해진 것이고, 나는 이제 여기서 무엇이 불순해졌는지에 관심이 있다, –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 표현방식에서 이상Ideal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오해하고 있다. 즉, 우리 역시 그것을 유희라고 부르겠지만, 단지 이상에 눈이 멀어서 »유희«라는 단어의 진짜 용법을 뚜렷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다.

101. 논리에서 모호함은 – 우리는 이렇게 말하려 한다 – 있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관념 안에서 살고 있다: 이상은 ›반드시‹ 현실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그렇지만 어떻게 이상이 거기서 발견되는지, 그리고 이 »반드시«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상이 거기에 들어 있어야 한다고 믿으니, 이미 그것이 현실 안에 보인다고 믿고 있다.

102. 논리적 문장구조의 엄밀하고 명료한 규칙들은 우리에게 배경에 있는 무언가로 나타난다, – 이해라는 매체 속에 감추어진 채로. 나는 지금도 이미 그것을 볼 수 있다(매체를 통해서 보고 있다고는 하나), 나는 기호를 이해하고, 그것으로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지 않은가.

103. 이상은, 우리 생각들 속에, 누구도 미치지 못하게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3] 너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 너는 매번 다시 돌아가야 한다. 바깥은 아예 없다; 바깥에는 숨 쉴 공기가 없다. – 어째서 그러한가? 관념은 비유컨대 마치 안경처럼 코 위에 걸쳐져 있어서, 우리는 쳐다보는 것마다 그것을 통해서 보게 된다. 그것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다.

[3. unverrückbar는 어원적으로는 “제자리에서 이탈시킬 수 없도록”의 의미다. 이탈된verrückt 사람은 그래서 미친 사람이다. 언어가 제공하는 이상들이 제자리에 놓여있는 사람은 정상인이며, 언어체계에 순응하는 사람이다. 이 이상에 의심을 품는 사람(예컨대 철학자)는 미친verrückt 사람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절묘한 표현을 재현하기 위해 여기서는 “누구도 미치지 못하게”라고 옮겼다.]

104. 사람들은 재현방식에 있는 사항을 보고 단언한다. 우리를 감탄케 하는 비교가능성을 두고, 우리가 극히 보편적인 상황을 감지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105. 우리가 그 질서, 그 이상을, 진짜 언어 내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일상적인 삶에서 »문장«, »단어«, »기호«라고 부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논리에서 다루는 ‘문장’, ‘단어’은 순수하고 예리하게 절단된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본래 기호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놓고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한다. – 그것은 예컨대 기호의 표상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의 표상인가?

106. 여기에서 어려운 것은, 비유하자면 머리를 똑바로 들고 있는 일, – ‘우리가 반드시 일상적 사고의 물건들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보는 일이며, 그리하여 길을 벗어나서, 우리 수단으로는 전혀 묘사할 수도 없는 세세한 사항들을 마지막 하나까지 묘사해야 한다는 감각을 느끼지 않는 일이다. 우리가 받는 것은, 마치 손가락만 가지고 망가진 거미집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107. 우리가 실제 언어를 더 자세하게 관찰할수록, 그것과 우리의 요구 간의 충돌은 점점 더 강해진다. (논리의 수정명료성Kristallreinheit은 내게 굴복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요구였다). 이제 충돌은 견딜 수 없어지며, 요구는 뭔가 텅빈 것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위협이 있다. – 우리는 얼음판에 발을 들인 것이다. 여기엔 마찰이 없으므로, 어떤 의미로는 이상적인 조건이나, 바로 그 때문에 걸을 수도 없다. 우리는 걷고자 한다; 그렇다면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지면으로 돌아가라!

108. 우리가 »문장«, »언어«라고 부르는 것이, 내가 상상했던 형식적 단위가 아니라, 서로 다소의 친족성을 가지는 구조물들로 이루어진 가족임을 우리는 인식한다. – 그렇다면 논리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논리의 엄밀함을 지탱하던 접착제가 떨어지는 듯하다. – 논리는 이것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닌가? – 어떻게 논리가 그 엄밀함을 잃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가 그 엄밀함을 약간 덜어낸다고[4] 일어날 일은 아니다. – 수정명료성의 편견을 제거하는 방법은, 우리의 관찰 전체를 뒤집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관찰을 뒤집되, 우리의 본래 욕구를 꼭지점으로 삼아 회전시켜야 한다.)
논리의 철학이 문장과 단어들에 대해서 말할 때, 이는 우리가 보통 삶에서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른 의미가 아니다. 예컨대 우리가 »여기에 중국어 문장이 쓰여 있군«이라던지, »아냐, 문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장식일 뿐이야«등이라고 말할 때와 같다.
우리는 언어의 공간적‧시간적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지, 어떤 비공간적‧비시간적 헛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추가 지적: 물론 하나의 현상에 관심을 가지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장기말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의 물리적 특성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명시하듯이, 그런 방식으로 언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어이라는 것은 본래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장기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유비적이다.

[4. abhandeln에는 덜어내다, 처리하다, 해결하다의 뜻 외에도 “논하다”라는 뜻이 있다. 중세 학술텍스트 양식인 논고Tractatus의 독일어 번역이 Abhandlung이며, 따라서 <<논리철학논고>>를 암시하는 단어 선택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첫 번째 책을 언급할 때 항상 라틴어 제목이 아닌 독일어 제목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이라고 불렀다. (줄여서 Abhandlung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자신이 과거에 이룬 업적에 대한 섬세한 거리두기 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109. 옳았던 것은, 우리의 관찰이 학문적 관찰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편견에 역행하여, 이런 저런 것들을 사고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경험은 – 그게 무슨 뜻이든 간에 – 우리의 관심을 일깨울 수 없었다. (사고에 대한 유령론[5]) 또한 우리는 어떤 이론도 세워서는 안된다. 우리의 관찰에는 어떤 가설적인 면도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설명은 없어지고, 오로지 묘사만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묘사는 그 빛과, 목적을, 철학적 문제들로부터 얻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경험적인 문제들이 아니며, 우리 언어의 작동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 해결되는 것으로, 바로 이것을 인식함으로서 해결해야 한다: 이를 오해하려는 충동에 역행하여.[6] 문제들의 해결은, 새로운 경험을 가르침으로써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한군데 모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철학은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 지성에 걸린 주술과 벌이는 싸움이다.[7]

[5. pneumatische Auffassung des Denkens. Pneuma는 희랍어로 숨결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사고에 대한 피상적인 플라톤주의를 비하하여 이렇게 지칭하였다. “사고”가 마치 독립적인 개체로서 유령이나 정령처럼 따로 존재하며, 언어는 이것의 물리적인 표현일 뿐이라는 견해이다. “정신”이나 “이데아”와 같은 철학개념이 아니라, 어원적으로는 숨결과 연관되며 원시적인 함의를 가진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오도된) 철학적 견해가 일상 속에서, 인류의 자연사적 측면에서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6. 이 부분의 문장구조는 독자를 잘못된 독법으로 오도할 목적으로 – 의도적으로 – 조성되었다. 인식해야 하는 “이것”은 문장의 흐름 상 콜론 다음의 ‘이를 오해하려는 충동에 역행하여’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언어의 작동’을 말한다. 이와같은 문장구조에서 난해함을 느끼면서, 독자는 “오해하려는 충동”이 무엇인지 독서경험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단순히 모호한 표현의 문제가 아님은, 철학적 탐구 초고에 대한 문헌학적 대조를 통해서 쉽게 밝힐 수 있다. 1936/37년에 쓰인 최초의 지적에는 이러한 모호함/난해함의 구조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후에 의도적으로 추가되었다.]

[7. 통상적인 해석은 “철학이란, 언어라는 수단에 의해 우리 언어에 걸린 주술과 벌이는 싸움이다”로 읽는다. 하지만, 문장구조상 “철학은 우리 이성에 걸린 주술과 언어라는 수단을 가지고 벌이는 싸움이다”로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문법적 중의성은 철학적 문제가 발생하는 방식과,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동일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번역에서도 중의적 해석의 여지를 가지는 대안을 택했다.]

110. »언어(또는 사고)라는 것은 뭔가 유일무이한 것이다« – 이는 미신으로 밝혀지며(오류가 아니라!) 문법적 착각들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이 착각들, 즉 문제들을 향하여, 이제 [우리의] 격정은 원래대로 낙하한다.

111. 우리 언어형태들을 잘못 해석하여 생성된 문제들은, 심층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깊은 불안함들이다; 이 문제들은, 우리 언어의 형태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안 너무도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들의 의미는 우리 언어의 중요성만큼이나 큰 것이다. – 자문해보자: 왜 우리는 문법적 농담이 깊다고 느끼는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철학적 심층이다.)

112. 우리 언어의 형태들에 흡수된 비유 하나가, 잘못된 인상을 만들어내고,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럴 리가 없어!« –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데!«

113. »그런게 틀림없어 —« 나는 거듭하여 혼자 되뇌인다. 내가 받는 느낌은, 이 사실에 내 시선을 아주 예리하게 집중하기만 하면, 그것을 정확히 초점영역에 밀어넣기만 하면, 이 일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4. 논리철학논고 4.5: »문장의 보편형식은 이것이다: 상황이 이러이러하다.« – 이는 사람들이 홀로 무수히 반복하는 부류의 문장이다. 사람들은 매번 자연을 뒤따라간다고 믿지만, 사실은 우리가 자연을 관찰하는 형태만을 고스란히 뒤따를 뿐이다.

115. 우리를 붙들어두었던 것은 하나의 영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빠져나올 수가 없었으니, 영상은 바로 언어 안에 있었고, 언어는 그것을 우리 앞에서 끝없이 냉혹하게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16. 철학자들이 어떤 단어를 사용하면서 – »앎«, »존재«, »대상«, »자아«, »문장«, »명칭« –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시도할 때면, 항상 자문해보아야 한다: 이 단어는, 그것이 고향을 두고 있는 언어에서, 매번 실제로 그렇게 사용되는가?
우리는 단어들을 형이상학적 용법에서, 다시 그 일상적인 용법으로 돌려놓는다.

117.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이 표현이 뭔지 이해하잖아? 자 그러니까, – 네가 알고 있는 그 의미로. 나도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 -마치 의미가 하나의 대기[8]처럼 단어에 붙어있어서, 어떤 용법으로 가더라도 같이 움직인다는 듯이 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이것은 여기에 있다« (앞에 놓인 대상을 하나 가리키면서)라는 문장이 그에게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면, 그는 사람들이 어떤 특별한 정황에서 실제로 이 문장을 사용하는지 자문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8. Dunstkreis는 대기를 나타내는 고전어Atmosphäre가 17세기에 독일어로 번역되며 생성된 것이다. ]

118. 그 관찰은 어디서 중요성을 획득하는가? 모든 흥미로운 것, 즉 위대하고 중대한 것이라면 전부 다 파괴하는 듯 보이는데 말이다. (마치 모든 건축물들을 부수듯이; 돌덩이와 흙더미만을 남겨놓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공기로 지은 건물들을 파괴할 뿐이며, 건물들이 서 있던 언어의 지반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119. 철학의 결과물은 어떤 뻔하디 뻔한 헛생각의 발견이자, 지성이 언어의 경계에 부딪히며 얻은 혹들의 발견이다. 그 혹들은 우리가 이 발견의 가치를 인식하도록 해준다.

120. 언어(단어, 문장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나는 일상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혹시 이 언어가 너무 거칠고, 물질적이어서, 우리가 말하려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다른 언어는 대체 어떻게 형성되는가? – 또 우리 언어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얼마나 이상한가!
언어에 대한 설명들에서, 내가 이미 전체 언어(준비용 언어나, 임시 언어 따위가 아닌)를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이미, 내가 언어에 대해 단지 외적인 것만을 언급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 하지만 그런 세부사항들이 우리를 과연 만족시킬 수 있는가? – 생각해보라, 네 질문들도 이미 이 언어로 짜여 있었으며, 이 언어에서 표현되어야만 했다. 질문할 것이 있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너의 의구심은 오해들이다.
네 질문들은 단어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니 나도 단어들에 관해 말할 수밖에.
사람들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단어가 아니라, 그 의미라고; 그리고선 의미라는 것을 마치 단어와 같은 부류지만, 단어는 아닌 물건으로 생각한다. 단어 따로, 의미 따로. 돈이 있고,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암소가 있다. (하지만 다른 편에는: 돈이 있고, 돈의 쓸모가 있다.)

121. 사람들은 이렇게 여길 수도 있다: 철학이 »철학«이라는 단어의 용법에 대해 말하다면, 2차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지가 않다; 이는 오히려 맞춤법의 경우에 상응하는데, 맞춤법은 »맞춤법«이라는 단어도 다루지만, 그렇다고 해서 2차 맞춤법은 아닌 것이다.

122. 우리 몰이해의 주요원천 중 하나는, 우리가 우리 단어들의 용법을 한눈에 보지[9] 않는다는 것이다. – 우리 문법에는 일목요연함이 부족하다. – 일목요연한 재현[10]은 이해를 제공하며, 이는 우리가 ›연관성을 보는 것‹으로 성립한다. 바로 그렇기에 중간연결물들의 탐색과 발명이 중요하다.
일목요연한 재현의 개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근본적이다. 이 개념은 우리의 재현형식,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지칭한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관‹인가?[11])

[9. Übersehen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평이한 의미는 “간과하다”인데, 훑어보다가 미처 따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 의미는 ‘개관하다’로, 한눈에 전체의 구조나 사태를 관망한다는 뜻이다. 한눈에 보기 위해서는 세부사항을 간과해야하므로, 두 의미의 중첩은 우연적인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이 두 의미층위를 교묘하게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10. Übersichtliche Darstellung은 개별요소들 간의 관계가 명료하게 드러나는 방식의 재현을 말한다. “개괄적 재현”이라고도 옮길 여지가 있다. ]

[11. 이 언급 뒤에는 원래 “(슈펭글러)”라는 말이 붙어있었는데, 나중 버전에서는 삭제되었다. 슈펭글러는 당대의 베스트셀러 “서구의 몰락”의 저자로, 비트겐슈타인은 “일목요연한 재현”방식이 현대 서구에 특징적인 경향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123. 철학적 문제는 이런 형태를 띤다: »나는 길을 모르겠다.«[12]

[12. 문맥에 따라 의미가 매우 유동적인 표현을 선택했다. 예컨대 고향에서는 느끼지 못하지만, 처음 보는 도시에 가면 받는 막막함의 느낌이기도 하며, 처음 보는 기계의 작동법을 모를 때의 느낌이기도 하다. 우리말에서는 “길 잃음”이라는 말로 가장 근접하게 표현되는듯하여 그렇게 옮겼다.]

124. 철학은 언어의 실제 용법을 어떤 방식으로도 건드려서는 안 되며, 결국에는 그저 묘사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이 그것을 정립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철학은 수학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며, 어떤 수학적 발견도 철학을 진일보시킬 수 없다. »수리논리학의 첨단을 달리는 문제«도 우리에게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수학적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125. 철학의 소임은, 수학적 발견, 논리-수학적 발견을 통해서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수학의 상태, 모순의 해결 이전에 있는 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 근본 사실은 이렇다: 우리는 놀이의 규칙들, 즉 하나의 기술을 결정하는데, 막상 규칙을 따르려고 하면, 가정했던 대로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스스로가 만든 규칙에 붙잡혀 버린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의 규칙에 붙잡히는 일,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려 하며, 한눈에 보고자 한다.
이는 우리 ‘뜻함’[13]의 개념에 빛을 비추어준다. 위와 같은 경우들에는, 우리가 뜻했던 것, 예측했던 것과 다른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컨대, 모순이 등장하면, 이렇게 말한다: »그건 내가 뜻했던 바가 아니다.«
모순의 세속적 지위, 또는 세속에서 모순이 가지는 지위: 이것이 철학적 문제다.

[13. Meinen 역시 의미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단어다. 머리 속으로 뜻하는 것, 실제로 말하는 것, 믿거나 생각하는 행위를 모두 의미할 수 있다. 이렇게 넓은 용법 때문에 철학적으로 특히나 문제가 된다고 여겼으며, 책의 후반부에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개념이다.]

126. 철학은 모든 것을 내버려둘 뿐, 설명도 추론도 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이 이미 열린 채로 있기에, 설명할 바도 없는 것이다. 또한, 뭔가 숨겨진 것이 있다 해도,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철학«은, 모든 새로운 발견과 발명 이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27. 철학자의 작업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기억을 한군데로 집합시키는 일이다.

128. 철학의 명제들[14]을 세우려고 한다면, 그에 대한 어떤 토론도 일어날 수 없을텐데, 모두가 그에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14. These는 여기서 “이 시대의 철학적 명제”와 같은 용법에서 보이는 “명제”의 개념과 거의 동일하게 쓰였다.]

129. 사물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면모들은 그 단순함과 일상성으로 인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 항상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 탐구의 본래 기반을 사람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혹시, 이것이 한번 눈에 띄었다면 모를까. – 이 말인즉슨: 그것, 단 한번만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강렬한 그것은, 우리 눈에 띄지 않는다.

130. 우리의 명확하고 단순한 언어놀이들은 장차 언어를 규범화하기 위한 전초연구가 아니며, – 비유컨대 마찰과 공기저항을 고려하지 않은 최초의 프로토타입 따위가 아니다. 언어놀이들은 오히려 비교대상들로, 그 유사성과 비유사성을 통하여 우리 언어의 양상들에 빛을 던져주는 역할을 한다.

131. 우리 주장의 불공정함, 또는 공허함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범을 있는 그대로의 것, 즉 비교대상으로 – 말하자면 척도로 – 제시하는 것이며; 현실이 반드시 부합해야할 편견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철학을 할 때 그토록 쉽사리 빠져드는 교조주의.)

132. 우리는 언어 용법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특정한 목적을 위한 질서; 수많은 가능한 질서들 중 하나의 질서; 단 하나의 질서가 아니라.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 평범한 언어형태들을 쉽게 한눈에 보여주는 구분들을 반복하여 강조할 것이다.[15] 그러다보니, 마치 우리가 언어를 개혁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는 인상이 일어날 수 있다.
특정한 실용적 목적을 위한 이러한 개혁, 실용적 용법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용어를 개선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관여하는 일과는 다른 경우들이다. 우리를 몰입시키는 혼란들이 생성되는 것은, 비유하자면, 언어가 작동하지 않고 공회전할 때이다.

[15. 같은 문장구조에서 다음과 같은 대안적 독법도 가능하다.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 평범한 언어형태들에서는 쉽게 간과될 수 있는 구분들을 반복하여 강조할 것이다.” 이러한 중의적 독서가능성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우리 평범한 언어에서 눈에 띄지 않는 그것이, 철학적 조사를 통해서 한눈에 보이도록 정돈되어야 하는 것으로, 지식의 증감 없이도 철학적 혼돈을 몰아내는 문법적 명료함을 수립할 수 있는 지점이다. 언어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한 번에 담아낸 uebersehen이라는 단어의 선택은 절묘하다.]

133. 우리는 우리 말들의 사용에 관련된 규칙체계에 전무후무한 정교함이나 완벽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명료함은, 결국 완벽한 명료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철학적 문제들이 완벽하게 사라져버려야 한다는 뜻일 따름이다.
진정한 발견은, 내가 철학함을 원할 때 언제든 멈출 수 있게 해주는 발견이다. – 철학을 고요히 잠재우고, 더 이상 스스로를 의심하는 질문들의 채찍질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발견이다 – 그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예시들을 통해 하나의 방법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 예시들의 대열은 언제든지 멎을 수 있는 것이다. – 해결되는 것은 문제들이지(제거되는 것은 난점들이지), 단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철학의 방법에는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얼마든지 여러 방법들이 있을 수 있으니, 마치 다양한 치료법이 있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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