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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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의 책을 보면, 하이데거가 지내던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집에는 그리스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뇌신雷神은 모든 것을 밝힌다 (Alles erhellt der Blitzgott)“

„존재와 시간“을 학부 2학기 때 읽으려 했지만 전혀 읽히지가 않았다. 그때는 철학이 무슨 행위인지 아직 감을 못잡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철학과에 가지 않았더라면 물론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철학과에 적을 두고 다른 과의 수업을 들으면서, 수업을 아예 안 들으면서 배웠다. 한번은 우중충한 수학과 건물에서 해석학2 수업을 듣다가 울면서 강의실을 나왔다. 수학 때문도 철학 때문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착실하게 철학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아예 길이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뒤돌아보면 웃음이 나오는 종류의 일이다.

평생에 걸쳐서 잔잔한 지혜를 닦아가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그런 사람들은, 추측컨대, 천둥을 사랑하고 기다린다. 기다린다고 치는 것이 천둥이 아니더라도 기다린다. 어느 원시부족이 비가 올때까지 제사를 지낸다는 „비과학적“ 믿음을 서술하는 프레이저의 방식에 비트겐슈타인이 반감을 품은 이유도 알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영영 이해하지 못한다.

내 몸으로 이루어진 렌즈를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했을때, 영상에는 끝없는 왜곡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그날 먹은 음식과, 내 체액의 묽기, 내 마음이 뒤틀린 정도, 여러 사람들이 나를 당기는 중력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붙잡을 수 없는 수식처럼 좌표계 위를 돌아다닌다고 했을때, 진정한 인식이 일어나는 것은 전혀 내가 책임질 수도 바랄 수도 없는 일이다. 그저 어느 순간에, 렌즈의 초점거리와 내가 원하는 대상의 거리가 맞아 떨어지고, 렌즈가 갑자기 맑아지고, 한 장의 사진이 찍히는 것이다.

„인식론“이라는 분과에서 내가 아무 것도 배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인식론을 생각할때마다, 인식론을 하는 자의 마음만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어느 컴컴한 장소에서 나와서 눈이 먼 것처럼 걷다가, 이 빛을 보았을까. 그리고 저 빛이야말로 세계의 근저라고, 봄이라는 것은 원래 이래야 한다고 불타오르며 펜을 잡지는 않았을까.

예전에는 노발리스가 밤을 찬양하는 것도, 횔덜린이 달을 노래하는 것도, 니체가 광기를 축복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빛도 어둠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어둠을 헤매는 모습 자체가 빛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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