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철학의 기술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강력한 것은 모름이다. 그리스인은 이것을 경이taumazei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철학의 목적은 진리의 체험이다. 모름을 익히고 행하는 것과, 진리를 체험하는 것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가? 방법에서 목적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모두 끊어진 느낌을 우리는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가짜는 아니다. 모름이 빛을 주는 방식이 바로 철학의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면서 살아가고, 알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 앎은 있다. 좋고 싫은 것과, 짧고 긴 것, 선하고 악한 것을 알아야만 생은 가능하다. 투쟁의 영역은 모두 이곳 앎의 장소에서 펼쳐진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려는 욕구, 알려는 의지는 힘을 향한 의지이다. 우리 언어는 오랜 세월 생과 투쟁하며 생겨나고 고착된 수많은 앎의 구조들로 층층이 쌓여있다. 그것은 필요에 의해 생겨난 편견이며, 필요에 의해 보편화된 편견이다. 우리는 언어, 판단의 렌즈를 끼고 현실을 바라본다. (다른 시선은 아예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현실은 항상 이미 분절된 형태를 띠고 우리 앞에 출현하는 것이다. 이 지점을 칸트는 선험apriori이라고 불렀지만,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심리와 언어의 영역으로 옮겨서 사유를 진행했다.
니체의 성과는, 도덕의 본질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도덕은 유용한 편견이며, 우리가 가장 숭고하다고 믿는 도덕적 감정 역시 예외가 없다. 도덕은 그런면에서 매우 비도덕적이다. 실은 다른 목적에 이용되고 있는데, 그 스스로를 우월한 위치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도덕은 거짓말이다. (더 자세한 분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의 성격상 생략하겠다.)
비트겐슈타인의 성과는 이와 매우 유비적이다. 그 이름은 ‚논리’이나, 사실 도덕과 같은 성격을 가지는 언어적 구조물이다. 논리의 엄밀함, 강제성, 필연성은 특정한 문법구조에서 우리가 받는 ‚강하고 지속적인 느낌’에서 기인한다. 언어를 통해 오랜 세월 세계를 분절시키고 재단하여 바라본 흔적이, ‚요구사항’으로, ‚수정명료성의 요구’로 나타나는 것이다. 진리 탐구자의 목적은 이제,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된다. 철학하는 나는, 문법적 요구에 불응하며, 그 기원을 추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피상적 언어사용에서 언어의 심층으로 들어가려는 첫걸음이다. 언어가 어떻게, 그리고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사유의 시작이다.
니체라면 ‚세계의 심장’이라고 말했을 이 영역에 접근하는 철학의 기술이 바로 ‚모름’이다. 철학적 문제(그리고 사실 모든 문제는 철학적 문제로 바라볼 수가 있다)를 제대로 바라보면, 그것이 옳거나 그르다는 층위에 머무르지 않고, 옳고그름의 가능성 자체에 초점을 맞출 수가 있다. 이것은 내용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형식에 대한 탐구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 문제가 옳은지 그른지, 나는 모른다. 둘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 다 가능하다는 것은, 이 모름이 근본적이라는 뜻이다. 모름이 먼저 있고, 그 위에 앎이 얹혀있다.
철학적 재능은, 문제를 보고 얼마나 빨리 ‚어지러움’을 느끼는가에 달려있다. 철학에서는 길을 잃는 것 자체가 재능이다. 다음의 문제를 보면서 각자 시험해보길 바란다.
거울에 비친 나는 좌우가 반전되어 있다. 내가 왼손을 들면, 거울 속의 나는 오른손을 든다. 그런데 왜 상하는 반전되지 않는가?
이 문제를 보고 ‚모르겠다’라는 고민에 빠져들었다면, 모름의 재능이 상당히 높은 사람이다. 반면에 ‚이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철학에 접근하기 조금 어렵거나, 아예 철학이 필요없는 사람일 수 있다.
이보다 훨씬 더 강렬한 문제들도 있다. 1학년 수업에서, 또는 처음 만난 사이에서도 순식간에 철학을 유발시키는 질문들이 있다. 시간에 대한 질문, 또는 색지각에 대한 질문 („네가 보는 색과 내가 보는 색은 똑같을까?“ 이 질문에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잘 보지 못했다), 진리의 문화사회적 상대성에 대한 질문 등등. 이런 문제들을 보면 우리는 의심을 일으키고, 놀라고, 모른다는 사실을 본다. 이 질문들은 말문이 막히게 만든다. 모르게 만든다. 논리학에서는 모순이나 동어반복에 해당하는 지점들로, 문법적 사실들이 우리 언어를 왜곡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의 곡률이 보이고, 그래서 그것이 렌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소다.
철학은 섬세한 기술이고, 그 결과물은 섬약하여 금세 부서진다.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철학의 경험을 오래동안 소지하고, 관리하여, 습관으로 만들어낸다. 철학은 한동안 매일매일 연습해야 한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모름을 실천해야 한다.
특정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소중하거나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모름을 실천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감정적으로 그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에 놓인다. (철학을 연습하기 좋은 환경이다) 그렇다고 해도 몰라야 한다.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행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깊이 몰라야 한다. 같은 일을 해도, 알면서 그러는 것과 모르면서 그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진리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진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에 나는 진리가 문장의 성질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문장(명제)은 옳거나, 그르다. 예컨대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문장은, ‚사과가 둥글다’라는 문장과 같은 형식을 공유하므로 둘다 진리값을 가질 수가 있다. 그러므로 두 문장 모두 같은 방식으로 옳거나 그를 수 있다. 인간은 평등하거나, 평등하지 않다. 사과는 둥글거나, 둥글지 않다. 둘 다에 대해서 우리는 사실을 발견하고, „진리“를 얻을 수가 있다. 하버마스가 윤리적 담론을 진리유비적wahrheitsanalog라고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문장은 결단코 진리의 운반자가 아니다. 문장은 사실의 운반자이며, 이미 분절되고 편견이 형성된 이후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주화이다. 문장, 언어적 현상은, 철학의 대상으로 보았을 때는 진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철학은 분절과 편견 이전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의 구조가 어떠한지를 보고자 한다. 그것을 ‚보려면‘, ‚렌즈를 통해 보이는 것’을 모두 모르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건 일상적인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그것을 가르치는 일은, 다른 기술의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아예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선은 세계 내의 사물에 너무나 강하게 접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 시선을 돌리는 일은 일반적인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여러 잔재주를 사용하면 잠깐동안, 그 지점을 바라보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정말로 철학을 삶의 근본기술로 가져갈 수 있는지는, 그 사람이 처한 환경과, 기질적 측면에 상당히 의존한다.
철학을 시작하기에 좋은 상태는 보통 고통은 많지만, 육체는 건강한 상태이다. 고통이나 건강 중에 하나가 없으면 철학을 시작하기 어렵다. 고통이나 실존적 고민이 있어야, 세계가 아닌 세계의 뒷편을 보려는 의지가 생긴다. 육체가 건강해야 그 상태를 일정한 수준으로 밀고나갈 수가 있다. (특정한 경우에는 몸이 약하거나 아픈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철학적 재능이 유별나게 높은 경우일 때가 많다. 성프란시스코, 니체, 비트겐슈타인, 데카르트..)
진리의 체험은, 하이데거 오두막에 써있는 글귀대로, 뇌신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모름을 계속하다보면 어떤 것을 정말로 알게 될 때가 있다. 텍스트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격렬하게 토론하다가, 갑자기 비쳐오는 아주 한순간의 빛이 있다. 빛의 강도는 매번 다르다. 그 빛을 함께 본 사람들은 영원히 이어진다. 강렬한 빛을 같이 보면, 서로의 영혼에서 떨어질 수 없게 된다. 빛은 언어 이전이고, 진리는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꼭 신비체험같은 것도 아니다.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이 기술을 익히고 가르치는데 청년기 이후의 시간을 온전히 사용했다. 처음 니체를 읽은 다음부터, 대체로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전부 이 방향을 향해서 왔다. 항상 의식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항상 진보가 있던 것도 아니다. 전혀 완벽하지 않은 수준이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많은 것(모든 것)을 투자한 만큼, 일종의 전문성을 갖추었다고 본다. (모름의 전문성이라니 아무튼 이상한 말이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하려는 일은 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거나, 유약하거나 비겁하고, 또는 형이상학적 피신처로 도주하려는 경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느껴왔지만, 근래에 내가 동족성을 상정했던 몇몇 사람들에게서 받은 반응은, 그러한 시선이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상관없다. 물론 감정적으로 어렵고, 심리적으로 감당이 안되는 부분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상관이 없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보았다면, 이유는 명백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어야 한다. (이건 어제 배웠다.)
철학에서 보통 중요한 것은 동지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이다. 철학에서 친구를 만나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너무나, 너무나 드문 일이다. 그건 사실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일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두개의 우주가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같은 지점을 향해, 말도 안되는 우연성을 가지고, 나란히 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일을 살면서 단 한번 경험했고, 그건 1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철학할 수 있는 힘을 줄 정도로 강렬했다. 그런 경험을 모두와의 만남에서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통 우리는 스쳐지나갈 뿐이다. 가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우연히 내가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친구가 되지는 못한다. 원래 그런 것을 어떡하겠는가.
죽은 사람들은, 같은 시공간에 있었다면 친구가 되었을 사람들이다. 또는 그랬으면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정을 상상한다. 나는 위로를 받는다. 나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내가 죽은 사람이 되었을 때,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그게 철학함의 목적은 아니라고 해도.
원래 말하려고 했던 지점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것으로 보아, 나는 원래 말하려고 했던 지점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거기에 응답하려는 윤리적 감정은 느끼지만, 그냥 내 방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도무지 설명하고 싶지가 않다. 설명을 하려면.. 위와 또 같은 말이지만.. 아는 것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나의 실수는, 모른다고 말했어야 할 지점에서, 진리체험의 빛에 고양된 탓에, 아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언사는 물론 안 좋은 것이다.
모르는 것에 주목해보라. 모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해보라. 발 밑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보라. 그때 한순간 아주 자유롭다고 느꼈다면, 서로 잠깐 친구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