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하다보면 우리는 분절되지 않은 웅얼거림을 내뱉고 싶은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빌려온 지혜이다)
„정당화“나 „설득“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유약한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나는 투쟁과 논쟁에 진심으로 임해본 적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근본적인 경험은, 그럴 필요가 있을때 조차,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보도록 해주었다. 길게 설명하는 글을 적다가 그만 두었다. 그냥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나는 내 위치를 확인했고, 상대방도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기를 빈다. 그 이상을 행하려면 정말로 상대를 사랑해야 한다. 그런 사랑이 없고, 그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내가 허깨비이냐고? 너는 허깨비가 아닌가? 어디를 붙잡고 있길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내가 독일인이냐고? 나는 독일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런 입장이 세계에는 정말로 존재한다. 한국어를 사랑하고, 한국어를 사랑한다.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살기를 바란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독일어를 사랑하고, 독일어는 나의 것이고, 창문 밖에 보이는 숲은 나의 것이고… 또 나는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한국어는 나를 이루고, 나는 한국어를 이루고, 창문 밖에 보이는 숲 아닌 것은 나의 것이고… 때때로 나는 마치 여기에서 태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내가 어디에 속하느냐고? 내가 어느 편에 속하느냐고? 그런 문제는 한번도 내게 중요한 적이 없었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아픈 사람들을 사랑한다. 멀리 떨어진 사람들, 죽은 사람들도 사랑한다.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세계가 있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은 사랑을 모르는가하면, 그것도 아니다. 거기서 우리는 이어지고 또 헤어진다. 아픔에 대해서 내가 가지는 유일한 입장은, 위로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연습해야 하는 특별한 자세가 있고, 그것은 매우 소중하고 유약한 것이어서, 얻기도 어렵고 가꾸기도 어렵다. 나는 가끔 그런 빛이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을 본다. 그걸 발견하는 날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그것이 질식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볼때는 캄캄한 기분이 든다. 가끔, 나 말고는 그것을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외로운 기분이다. 내가 생각하는 소중한 지점을, 한국사회의 담론방식이 양편에서 모두 교살하고 있다는 느낌을 나는 받는다. 이성이 있는 인간이라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지금 이 글도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언제든지 독일어로 증발해버릴 수 있는 허깨비이다. 독일어가 없더라도 증발해버릴 수가 있다. 증발해버릴 수가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굽혀라. 하지만 포로가 되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말하라. 누구의 싯구인가? 안전함… 위험함. 반항, 순응. 나는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졌다. 나는 틈을 찾아서 간다. 내가 보이는가?
지금의 나는 침묵할 수 없는 인간임이 드러났다. 정말로 침묵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