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 2016 06 10

페이스북이라는 공간을 지켜보면서 나는 점점 입이 돌처럼 변해갔다. 모든 말을 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모든 종류의 말이 다 있어서 딱히 말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이 감각에서 나온 첫번째 반응은, (전보다도 더 높은 비율로) 실없는 소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단둘이 이야기를 하거나, 친밀한 분위기가 조성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아예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듣지도 않았다. 특히 공식적인 자리일 수록, 나는 아무 내용도 없는 말을 하려고 애썼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감각이 아주 짙었던 2-3주였다. 그렇다고 사물에 대해 견해를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꺼내어보이고 싶을 정도로 견해가 확정되는 일은 드물어졌다.

이런 경향은 내 스스로를 쳐다볼때도 강화되었다. 내 머리속은 항상 대단히 시끄러운 편이다. 여러 상황에서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대적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마치 상상으로 무협영화를 찍거나, 마음 속에서 총격전을 벌여보듯이, 내 머리는 끝없이 논증과 토론과 싸움을 재생한다. 이건 정말로 아주 성가신 일이고, 나는 아무런 소음도 없는 상태를 원하게 되었다. 머리속에서 페이스북 담벼락이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런 면에서 페이스북은 인간 마음의 어떤 부분에 대한 아주 탁월한 모사이다). 그런 생각들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빠르게 걷거나 뛰거나, 산길을 걸으면 아주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렇게 얻는 마음이 훨씬 순수하고 값지다. 니체의 말대로 „근육의 건강한 제전 아래에서 얻은 생각이 아니면 믿지 말 것“이다.

말과 생각을 그렇게 조용하게 만들고 싶지만, 가르침을 찾을 때와,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때는 다르다. 정말로 배울 수 있는 사람에게 물을 때는, 낯설고 생경한 말이 그 사람 입에서 나오기를 바란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을 잘했다고 인가해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늘은 자연에게 배울 것이 많았다. 한시간 정도를 걸어서 관악산 구석에 있는 상당히 높은 부분까지 올라갔는데, 한순간에 앞이 탁 트이면서 건너편 능선과 숲, 암석이 빛 속에 녹아내릴듯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때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바람은 항상 불고 있음을 보았다. 바람이 불지 않더라도, 아무튼 바람은 불고 있는 것이다. 숲의 한부분이 바람에 일렁이면, 다른 부분은 가만있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부분이 다른 방향과 속도로 움직이기도 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했고,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비밀은 아니었다. 아름다웠고 안심되었고 감동적이었다.

그것은 내 모습이라고 생각되었다. 바람과 숲이 만나는 지점이 나였다.

 


 

철학이라는 것은 정말로, 무슨 행위일까? 내게는 오로지 이 질문만이 중요하다. 이것은 다른 모든 질문에 앞서는 질문이다. 이미 몇년 동안이나. 이 질문을 창끝으로 삼아서 앞으로(앞으로?)나아가고 있다.

세계와 삶이라는 공간에서, 나는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그 놓치는 것에 대한 감각은 내가 철학이라는 행위를 하도록 강제한다. 말하자면 나는 철학을 안할 수가 없다. 대상은 없는데, 아무튼 상실감에서 찾아나서게 되었다. 방법도 모르고 길도 없지만 그걸 만들어서라도 나는 찾는다. 모르는 것을 찾는다.

철학은 무언가를 알거나, 아는 것을 정립하거나, 해석하고 운용하는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많은 경우에 – 대부분의 경우에 – 철학은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행위다.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철학자가 되는듯 하다.

한편으로는, 단어의 의미가 소통과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인 동시에, 주와 객이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단어의 의미에는 깊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표면과 심층이 있다. 단어에는 의미의 퇴적이 일어나며, 좋은 단어를 선택하면 세계의 발생을 역추적할 수 있다.

모든 면에서 철학은 언어적인(유사언어적인) 행위이다. 언어를 넘어가는 지점에서도 언어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만이 „침묵도 소통“이라고 한 것은 납득이 간다. 말을 매개로 한다.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게 될 때, 우리는 일종의 경이를 느낀다. 이 경험은 재생산하기가 아주 용이하며, 그래서 철학에서 오랜 시간 동안 주된 기술로 사용되고 전수되었던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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