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 – 로베르트 발저

(산문집 „시인의 삶“에서)

몇 해 전이었나, 지금 떠오르는 기억인데, 어느 여름에 나는 처음으로 먼 거리를 도보로 여행했다. 그때 보았던 온갖 이상하고 아름다운 일들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가진 장비로 말할 것 같으면, 몸에는 환한 색깔의 싸구려 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곤색 모자를 쓰고, 손에는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다. 안주머니에는 저축한 돈을 꿰매어 넣었는데, 깔끔한 은행어음의 형태를 한 이 돈과 함께 나는 싱그럽고, 밝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길에서 마주친 버릇없는 남자아이들 중 한명이 내 등 뒤를 향해서 조롱하듯이 소리 질렀다: “길쭉한 친구, 조그만 보따리를 메고 어디로 가시는가?”

  내 불쌍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여행가방을 말하는 것이었다. 실은 가방의 운반자이자 주인인 내게도 조금은 우스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특별한 의미가 없었을 농지거리에 별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힘차게 걸었고, 그렇게 계속 행군하고 있노라니, 둥근 세상 전체가 나와 함께 움직여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만물이 걷는 자와 함께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들판도, 풀밭도, 숲도, 밀밭도, 산들도, 그리고 내가 걷고 있는 시골길까지도.

  마음이 하늘처럼 자유로워지고, 가슴은 편안해졌다. 나는 씩씩하게 걷고 또 걸으면서, 편하지만 동시에 서두르면서,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곁을 지나쳤다. 나처럼 젊고 명랑한 여행자를 보고서, 유랑하는 유랑민들이 가끔 인사를 건네오면, 나 역시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친절함은 또다른 친절함을 불러일으키는 법이 아니던가?

  무언가 축축하고, 안개 끼고, 싸늘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건 아마 새벽이 나를 습기로 어루만졌던 기억이리라. 그리고 바로 다음에는 뜨겁고, 하얗고, 푸른 것이 뒤따랐다. 이건 정오가 되어 길 위에 이는 먼지와, 녹색의 바닥에 비치던 건조하고, 눈부시고, 밝은 태양빛이었다.

  며칠간 나는 어떤 강을 따라서 주욱 걸었고, 그 다음에는 어떤 산맥으로 들어갔다. 능선 위에 옛 성의 폐허를 짊어진 높은 산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다채로움과 단조로움이 즐거운 듯, 다채롭게 뒤바뀌며 나타났다. 도시와, 산성山城과, 산과 골짜기와, 외로운 마을들이 있었다. 아래로 깊이 내려가면 좁다란, 어두운, 으슥한, 차가운 계곡이 있었다. 절벽의 외로움과 비좁음을 부수며 갑자기 터져나오더니, 평지가 되어 도망가다가, 푸르고 예쁜 강이 되어 반짝이는 웃음을 짓다가, 이내 진지하고 충실한 녹색의 숲이 되어 명예롭고 기백있게 서 있다가, 갑작스레 고집불통의 산이 되어 높게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생소하고 모험적인 것, 아름답고 친근한 것이 서로 어울렸고, 정오의 밝음은 저녁이 되면 비밀스럽고, 편안하고, 그토록 기원했던 어둠으로 변했으며, 뜨거움은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서늘함으로 바뀌었다.

  이곳저곳에 당도하여 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오래된 여관에서 밤을 보내곤 했다. 어느 날 밤 머물었던 방은 너무도 화려하고, 진중하고 심오한 공간이어서, 축연을 여는 홀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느 아침 나는 산중턱 부드러운 땅에서, 상수리나무 그늘에 선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거기에서 너무나 아름답고 따뜻한 햇빛 속에서 반짝이던, 자상한 여름 아침 햇살에 몸을 담그고 빛나던, 사랑스러운 숲 속의 마을, 산 속의 마을을 보았다. 아 도보여행이란 얼마나 건강하고, 좋은 즐거움인가. 아픔 없는 즐거움이야말로 진정한 즐거움이라 하겠다.

  거칠고 폭풍이 휩쓰는 지역과, 사랑스럽고 온건한 지역이 뒤바뀌며 지나갔고, 가난하고, 나쁘고, 황폐하고, 쇠락한 집들이 멀쩡하고, 구색을 갖춘, 부유한 집들과 엇갈리며 지나갔다. 그리고 계속 전진하는 방랑자이자 기쁨으로 가득 찬 유랑자는, 아무런 걱정을 느끼지 않았기에, 눈앞에 펼쳐지는 이 모든 다채로운 현상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아주 큰 즐거움을 누렸다.

  어떤 때는 새벽의 환한 빛 속에, 밝은 일광 속에 서있기도 했지만, 또 어떤 때는 늦은 저녁의 유령처럼 창백한 빛 속에서, 어스름 속에서 괴상하고 낯선 언덕에 서있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내 아래에는 아침이나 저녁의 영역이 놓여있었다.

  그렇게 외롭고, 이상스럽고, 멀리 떨어진 골짜기를 한두 시간 걷다보니,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시대가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고, 마치 나 자신도 중세의 방랑 견습생이 된 것 같았다. 날은 더웠고, 눈길 닿는 곳 어디에도 사람이 사는 흔적이 없었다. 조금의 노동도, 교육도, 노력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인적이 끊긴 자연에는 대단하고도 무시무시한 마력이 있다.

  도보여행이 끝나갈 무렵에는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그리하여 나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기쁘던 우울하던, 만족스럽건 불만족스럽건 간에, 온통 부들거리고 젖은 채로 목적지에 도착했던 것이다.


얼마전에 친구와 함께 일주일 동안 흑림을 걸었다. „다채로움과 단조로움이 다채롭게 뒤바뀌는“ 것이 도보여행의 진정한 매력이다. 걸어서 간 곳만이 진짜 간 곳이라는 말이 있고, 길 위에 아직도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래된 여관에서 묵으면, 별하늘이 보이고 소떼가 움직이면서 내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높은 곳에 서서 호수며 골짜기의 마을들을 바라보면, 전에 없던 기쁨과 자유가 몸을 가득 채워온다.

발저가 쓴 글이지만 내가 본 것이기도 하고, 가끔 번역은 단순히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4 Kommentare zu „도보여행 – 로베르트 발저

  1. ‚Wandern’이 이런 느낌인 것인가.. 한편으로는 자꾸만 유격 훈련 끝나고 군장 메고 행군하던 생각이 겹치는 것이 참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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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자려는데 페이지가 계속 맴돌았어요 산 오솔길에서 커다란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갔어요 하늘을 스치는 날개와 마주쳤어요. 새의 길.하고, 그 눈에, 하얗게 멎어버렸어요. 묘한 글 같아요. 빛이 사방에, 겸손해서, 올려 든 고개가 부끄러워 방울방울 되었어요 아름답고 기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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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읽으면서 줄곧 걷는 발이 걸으며 앉은 발과 같아지고 떠도는 얼굴이 여기의 하늘까지도 불쑥 불쑥 천천히 나타났어요 서늘한 밝음 두꺼운 창이 가로놓여도 단어 피부에서 부연 온도로 겨울 그늘빛, 빛그늘이. 유리구렁처럼 깊고 주르륵, 빛나는… 몇번이고 새로 보고 마는 아주 작은 이정표들 정말로 괴이하네요 댓글에 많이 주절거려 죄송합니다… 무척 홀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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