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 2016년 10월 12일

잘 모르겠다. 철학이라는 말은 탈리스만처럼 나를 나쁘고 불순한 것들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는데, 정작 대학의 강의계획서들을 읽어보니 내가 하는 일이 철학이 맞는지 의심이 되었다. „니체와 소크라테스의 싸움“ 세미나 말고는, 진심으로 관심이 가는 철학과 과목이 단 한개도 없었다. 결국 비교문학과의 „번역이론의 문제“ 강의, „번역이론들“ 세미나, „하이데거의 숲길“ 세미나를 듣기로 했다. 종교학과의 „식민주의와 종교“ 강의를 듣기로 했다. 이번 학기에 내가 세운 최고의 야망은 „희랍 문화와 언어 입문“으로, 희랍어 1에 해당하는 수업이다. 고대어를 배우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철학이라는 탈리스만이 정말로 나를 지켜주는지는 책방에서도 의심해야 했다. 물론 하이데거의 책을 네권이나 샀고, 하이데거가 나의 은밀한 취미가 된지 한두달이 지났다. 물론 나는 도서관에서 잠이 올때 슬쩍 철학서쪽으로 걸어가서 하이데거 전집을 순서대로 뽑아서 훑어 읽으면서 잠을 쫓는 버릇을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하이데거라는 틀을 가지고 오늘날 정말로 제대로 생각할 수가 있는가? 학계라는 공간에서는 물론, 물론 안될 일이다.

다음학기에 친구가 진행하는 세미나에서 „번역“을 주제로 하는 시간의 수업을 부분적으로 도와주기로 했다. 즉 „번역“이라는, 내 지난 2년 간의 삶을 지배해온 주제를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소화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 것이다. 나는 3년 동안 변화한 나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으므로, 예전처럼 비트겐슈타인의 품으로 달려가는 대신 정말로 자유롭게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가장 도움된 글은 „일본어의 훈독“ 번역과 주체의 저자인 사카이의 논문 „번역“, 성경번역에 관한 논문집, 맥루한의 „구텐베르크 갤럭시“, 등이었다. 철학자의 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은 루만 제자인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의 교수자격논문 „가속Beschleunigung“을 사서 순식간에 100페이지 가량을 읽었다. 내가 한국과 독일을 살면서 품고 있던 의문들, 니체와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를 보면서 예감하게 된 것들에 실체가 부여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회학은 현대/근대라는 현상을 보고 놀라지 않으며, 현상의 „몸“에 직접 손을 갖다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회학은 더러워질까 겁을 내지 않는 것 같았다. 에바 일루즈의 „왜 사랑은 아픈가“도 샀다. (커버가 핫핑크라서 살때 조금 부끄러웠다..) 로자만큼 본격적이진 않았지만, 직접적인 분석과 손에 잡히는 대상이 주는 큰 쾌감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제도는 잘 알려져 있고, 나는 경험적으로 그것과 많은 접촉을 했기 때문이다.  사회학 책을 읽으면, 매일매일 생각하면서 스스로 이론화를 하던 것들이 한번에 풀려나가고, 구체화되고, 검증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책은 매일매일 생각하면서 — 생각이라는 게 무엇인가? 를 생각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해준다.. 맞나? 철학은 안개와 맞서는 작업이라서 숨막힌다. 숨막히게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번역“이라는 대상에 생각을 묶으니, 아무렇게나 흩어지던 정신에 날이 선다. 날이 선다는 것은 긴장을 의미하기도 하고, 힘의 집중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자를 수 있게 되고, 막을 수 있게 된다. 날지 못하게 되고 수영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일어의 독재는 막강하다. 독일어에는 체계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힘이 있다.  한국어로 말하려니 생각의 내용이 아니라 생각의 질감에 대해서만 말하게 된다. 문이 닫혀 있어서, 문을 매만지면서 문에 대해서만 말하는 식이다. 나쁜 일은 아니다. 문의 쓸모는 통과만을 위한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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