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번역어

나는 마음이라는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정신의 많은 부분을 나타내는 말들이 독일어에는 무수하게 많지만, 이 말처럼 사람을 이끌수 있는 것이 그중에 없기 때문이다.

20대 전체를 나는 정신Geist라는 말에 얽매여서 살았다. 육체와 완전히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정신, 육체와 영원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기관으로서의 정신이 Geist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따르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은 자아다. 자아란 또 무엇인가? 자아는 스스로와 관계하는 관계, 또는 관계가 스스로와 관계한다는  지점이다. 자아는 관계가 아니며, 관계가 스스로와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무한과 유한의 종합이며,  영원과 유한의 종합이며,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며, 짧게 말해 하나의 종합이다.

Der Mensch ist Geist. Aber was ist Geist? Geist ist das Selbst. Aber was ist das Selbst? Das Selbst ist ein Verhältnis, das sich zu sich selbst verhält, oder ist das am Verhältnis, dass das Verhältnis sich zu sich selbst verhält; das Selbst ist nicht das Verhältnis, sondern, dass das Verhältnis sich zu sich selbst verhält. Der Mensch ist eine Synthese von Unendlichkeit und Endlichkeit, von Zeitlichem und Ewigem, von Freiheit und Notwendigkeit, kurz eine Synthese.

(독어본에서 번역)

 

주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정신을 생각했고, 종합이란 말 안에 들어있는 분쟁적인 요소를 느끼기는 했으나 그것을 아픔으로, 절망으로 느꼈다. 키에르케고르도 그것을 절망이자 아픔으로 느껴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다루었던 것 같다. 종교적 세계관을 버릴수 없지만, 그렇다고해서 도피할 수도 없음을 알아챈 현대인에게 어울리는 길인가 한다. 항상 예민한 인간들은 서둘러서, 앞장서서 고통받는다.

정신Geist는 독일어 내에서 너무나 맑은 말이다. 강하고, 흔들리지 않고, 죽일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말이다. 나쁘게 말하면, 몸을 잃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는 개념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아마 이것이 논리의 수정명료성Kristallreinheit der Logik과 같은 뜻이었을 것이다. 더럽혀질 수 없고 굳건한 것, 파괴될 수 없는 것이기에 숭배와 의지의 대상이 되는 것.  비트겐슈타인을 파고 또 파다가 문득, 이 길이 아닌 것을 알았다.

정신Geist말고도 독일어에는 영혼Seele가 있다. 이것은 현대에서는 대체로 종교적 문맥에서만 사용되며, 전반적으로는 이미 그 존재가 부정되고 있다 (안타깝다..) „이 시대의 정신Der Geist unserer Zeit“이라는 말에는 어떤 모순도 느껴지지 않지만, „어떤 일의 영혼Die Seele einer Sache“이라고 말하면, 이미 수사학적인, 풍자적인, 우스운 느낌이 난다. 주류분석철학의 플래그쉽 문제가 심신론Leib-Seele-Problem으로 표출된다는 사실 역시 이미 영혼이라는 개념의 의미지평이 축소될 대로 축소되어, 형식논리적인 공격을 허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이것은 형식논리학의 진리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영혼Seele은 독일어에서 „마음“의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후보였으나, 한때 타락한 교회의 언어였다는 죄로 지금은 사용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Gemüt라는 말도 있다 (번역하기가 좀 어렵다). 이것은 좀 독일적인 것으로, „분위기“나 „기분“ 쪽에 해당하는 언어다.  정신Geist보다 „마음“에 좀 더 가까운데, 기본적으로 조종할 수 없다는 어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칸트까지만 해도 자주 사용하는데, 현대철학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정신을 표현하는 낱말들 중 가장 파괴력 있는 말들은  이성Vernunft, 지성Verstand(오성) 따위의 단어들일 것이다. 이런 말들은 철학 시스템 내에서 정립된, 조어에 가까운 단어사용이 얼마나 일상어 속으로 침투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예시이다. 합리주의는 몇세기전부터 유럽은 물론이고 지금은 전세계의 지성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현대가 희랍어 Logos에 대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해석이자 번역인데, 과연 소크라테스같은 사람이 만족스러워할 번역인지는 미지수다.

철학의 외부, 정신분석학에서 의식Bewusstsein과 무의식Unterbewusstsein을 구분한 것은 대단한 성과다. 내 생각에 합리주의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낭만주의 철학이라는 무모한 시도가 없었다면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직 이성적으로 판별되고 의식적으로 분별되는 것만이 현실(데카르트의 „명석판명clare et distinction“)이라는 교조에 대항해서 등장한 것이 무의식 개념이라고 읽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말에서 나타나는 일원성, 통일성은, 굳이 이성과 감성(낭만주의), 의식과 무의식, 몸과 영혼 등을 분리했다가 다시 합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철학책을 읽으면서 20대를 헤매인 나의 경우에는, 이렇게 먼길을 돌아오느라 참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이라는 문이 열린 것 까지는 좋았는데, 밟고 갈 계단들이 너무 높고 방향이 틀어져 있었다..

아무튼, 분화 이전의 개념들을 모국어로 새기고 있다는 것은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고선생님이 유대인이 „고대어와의 접점“때문에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추측한 것도  비슷한 선에 있다). 한국어가 아직 옛 언어스러운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일어와 한국어 사이를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배울 점이 아직 무한하게 많다. 오랫동안 두 언어 사이의 거리가 멀고 멀었으면 한다. 한국어가 자본의 흐름 속에서 마멸되지 않고, 다가오는 세대들에게도 미약하게나마 길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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