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여행기 #1

새벽에 뮌헨 공항을 떠나, 이스탄불을 경유해서 아테네의 숙소에 도착하자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서울에서 오신 아버지는 에어비엔비에 몇시간 전에 이미 도착해서, 아카시아 나무가 드리운 발코니에서 브루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을 읽고 계셨다.

 

나는 그리스의 공기를 처음으로 마시고, 햇빛을 처음으로 쬐었다. 아무런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남의 집에 앉아 있었지만 내 집처럼 편안했다. 위험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 자체가 무언가로 가득 차있는 듯 했다.
느긋하고, 따뜻하고, 생명으로 넘쳐 흐르는 공기다.
다급한 마음,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마음, 뭔가 쌓아올리거나, 저장하거나, 축적해야 한다는 마음이 없다.
빨리 움직일 필요도 없을 뿐더러, 빨리 움직일 수도 없다.
반대로 마음의 작용은 한결 자유롭다.
여기에 겨울 따위는 오지 않는다는 생각,
나아가 내 마음 속에 단 한번의 겨울도 없었다는 환상이자 희망이, 곧 사실이 되어서 다가온다.
현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 나아가 부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내가 그 위에 떠있을 수 있는 튼튼한 공기와도 같다.
그런 공기가 여기에는 있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얻는다.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발버둥을 치면서 수면 위에 떠있고자 고생을 했는가, 그런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독일에서, 얼마나 열심히 살면서 사람과 물건을 통제하려고 애썼는가..
베란다의 아카시아 나무에 온갖 벌들이 날아와서 꿀을 마신다.
그렇게 나도 아테네의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꽃처럼, 아테네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뙤약볕을 뚫고 아버지와 아크로폴리스에 올랐다.

 

아크로폴리스는 겸손함이라고는 없는 그리스인들의 강대함을 건축으로 바꾸어놓은 듯했다.

아테네 시내 전체를 우월감에 차서 내려다볼 수 있는 막강한 암벽 위에 지어진 이곳은, 신들로 하여금 지상에 살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들 또한 신들과 더불어 살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인간은 하늘을 향해 신전들을 밀어올리고, 신들은 인간의 희생제물의 연기를 들이마시기 위하여 지상으로 강림한다.

나는 아크로폴리스는 인간과 신이 만나는 장소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종교는 단순히 천지의 접촉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늘에 굴복하거나 거기에 맹목적으로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 오히려 아크로폴리스에서 인간은 신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선다. 신들의 우월함 속에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의 젊음과 우월함을 투영하였다.

횔덜린의 비가 <빵과 포도주>의 구절이 생각났다. 되는대로 아버지에게 즉석에서 번역해드렸다. 횔덜린이 말한 것처럼, 여기에서 보니 바다가 바닥을 이루고, 산맥들이 탁자에 불과한 거대한 연회장에 들어온 듯 하다고. 아크로폴리스를 그리스인들은 자신을 상승시킴으로써 세계를 보는 광학을 바꾼것 같았다.

나중에 집에 와서 해당구절을 번역해보았다. <빵과 포도주>의 4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복한 그리스여! 너 뭇 천신들의 집이여,

그러니 우리 어린시절에 들었던 이야기가 진실이란 말인가?

축연의 장이여! 바다가 바닥을 이루는구나! 산맥은 탁자로구나!

진실로 단 하나의 의례를 위해 예전에 지어진 것이니!

그러나 왕좌들은 어디에 있는가? 신전들은, 넥타르로 채워진

술통들은 어디에, 신들의 쾌락을 위한 노래는 어디에 있는가?

아크로폴리스 위에 올라서 있으면, 스스로가 한명 거대한 신이 된 것과 같은 환상에 빠진다. 저 아래편의 인간세계는 먼지처럼 의미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린다. 내가 서 있는 „천신들의 집“은 대리석의 순수한 하얀색으로 빛나며, 그 위로는 구름 한점 없는 푸르름이 펼쳐져 있다. 일상의 번잡한 세계, 즉 고통의 세계는, 신계라는 환상을 이룩함으로써 자취없이 가려져버린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아폴론적 예술“은 필멸의 고통을 은폐하는 가상의 예술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 건축은 햇빛에 관한 것이다. (아폴론은 빛과 조형의 신이다!)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신전 건축을 보면 대체로 인위적으로 깊은 어두움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반면 그리스 건축은 모든것이 야외의 훤한 빛 속에서 이루어진다. 빛은 구태여 연출하지 않더라도 어디에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의 당당함은 그 자연적인 풍성함으로부터 오며, 풍성함을 마음껏 낭비하는 거침없는 정신에서 오는듯 했다. 이곳의 자연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저녁에 아버지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타베르나Taverna)을 찾았다.

동네 사람들이 무슨 행사를 하는지 몇십명씩 한 테이블에 앉아서 구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끄러웠다. 여름밤의 공기가 따뜻하게 피부에 와 닿았고, 태어난지 한달쯤 된 새끼 고양이들이 겁도 없이 다가와서 우리를 올려다보면서 울었다.

빵과 포도주가 나왔다.

빵은 평범하고 말이 없어서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빵이라는게 원래 소박하여 이런가보다. 포도주 역시 프랑스처럼 거창한 „아뻴라시옹“ 에티켓이 병에 담겨 있지도, 유약한 크리스탈 잔에 우아하게 담겨 나오지도 않았다. 격식이 시끄럽지 않고 순해서 좋았다. 붉은 포도주는 그냥 막 나무통에서 따라서 구리로 된 투박한 병에 담겨서 나왔고, 잔은 물잔보다도 더 보잘것 없는 짜리뭉툭한 잔이었다. 쓸데없이 향을 끌어낸다는 이유로 실온에 두지 않고, 그냥 솔직하게 차갑게 식혀서 나왔다. 집에서도 이렇게 와인을 편하게 대해본 적이 없었다. 그 맛은 놀라울 정도로 달콤하고 청량했다. 우리는 구리병을 두번 더 채우면서, 밤이 될 때까지 마셨다. 양갈비를 먹고, 전채를 4가지나 먹었는데도 전부 합해서 40유로밖에 나오지 않았다. 독일의 반값, 서울로 치면 1/3 정도 되는 가격이 아닐까. 아버지와 나는 그리스가 좋았다. 내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정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리스에서는 어려운 일들, 불가능한 일들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 놀라운 마음을 간직한채 잠들었다.

 


 

빵과 포도주

프리드리히 횔덜린

4

지복한 그리스여! 너 뭇 천신들의 집이여,
그러니 우리 어린시절에 들었던 이야기가 진실이란 말인가?
축연의 장이여! 바다가 바닥을 이루는구나! 산맥은 탁자로구나!
진실로 단 하나의 의례를 위해 예전에 지어진 것이니!
그러나 왕좌들은 어디에 있는가? 신전들은, 넥타르로 채워진
술통들은 어디에, 신들의 쾌락을 위한 노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 어디에서 빛나는가, 멀리에서 날아와 적중하는 신탁들은?
델피가 잠들어 있으니, 거대한 운명은 어디에서 울리고 있는가?
번개 같은 운명은 어디에 있는가? 온 사방 지복으로 가득찬 그것은
어디로부터, 맑은 공기를 뚫고서 눈앞에 나타나는가?
아버지 에테르시여! 운명은 그렇게 부르짖으며 혀에서 혀로
수천갈래로 비행했으니, 삶은 그 누구도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것;
그처럼 값진 것을 서로 나누면 기쁘니, 낯선 이들과 바꾸면서,
하나의 환성이 되고, 말의 권력은 잠든 사이에 자라나
아버지! 밝습니다! 멀리까지 울려퍼지니, 태초의 징표,
선조에게 물려받은 그것은 적중시키고 또 창조하며 아래로 뻗어나가는구나.
이렇듯 천신들은 자리를 찾아 머물고, 이렇듯 깊은 전율을 전하면서
그림자로부터 나타난 대낮은 지상의 인간들에게 와닿는도다.

Seliges Griechenland! du Haus der Himmlischen alle,
Also ist wahr, was einst wir in der Jugend gehört?
Festlicher Saal! der Boden ist Meer! und Tische die Berge
Wahrlich zu einzigem Brauche vor Alters gebaut!
Aber die Thronen, wo? die Tempel, und wo die Gefäße,
Wo mit Nektar gefüllt, Göttern zu Lust der Gesang?
Wo, wo leuchten sie denn, die fernhintreffenden Sprüche?
Delphi schlummert und wo tönet das große Geschick?
Wo ist das schnelle? wo brichts, allgegenwärtigen Glücks voll
Donnernd aus heiterer Luft über die Augen herein?
Vater Äther! so riefs und flog von Zunge zu Zunge
Tausendfach, es ertrug keiner das Leben allein;
Ausgeteilet erfreut solch Gut und getauschet, mit Fremden,
Wirds ein Jubel, es wächst schlafend des Wortes Gewalt
Vater! heiter! und hallt, so weit es gehet, das uralt
Zeichen, von Eltern geerbt, treffend und schaffend hinab.
Denn so kehren die Himmlischen ein, tiefschütternd gelangt so
Aus den Schatten herab unter die Menschen ihr 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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