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블로그에 처음으로 글을 쓴다.
페이스북을 매장해버리고 나서 (연락 용도 때문에 아직 완전히 매장하지는 못했다)
마음에 많은 시간이 남게 되었다. 헛생각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발화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이 있다. 세상에 뱉은 말은 유령처럼 계속 나한테 돌아오는 것 같다
뭐 그런 느낌
이렇게 워드프레스의 인터페이스로 글을 쓰고 있으면
좋아요와 댓글과 메시지를 받을 전망이 아예 없기 때문에
흥분하지 않는다. 문장 하나하나에 좋아요를 향한 장치를 탑재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왜 쓰고 있는가? 불특정 다수가 읽으라고 내 생각을 뒤집어 놓던 15년 된 습관의 그림자일까?
자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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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선가귀감> 상권 (언해본 기준)의 초역을 끝마쳤다.
원문 번역만 놓고 보면 40% 정도를 마친듯 하고, 이제 한문/중세국어->독일어 번역이 나름 몸에 익었다.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결과 – 당연히 내 인생을 생각하면 아직 풋사과일 수밖에 없지만 – 약간 문리가 트였다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만큼은 되었다. 현토가 달려있고 문맥을 얼추 알고 있으면 대강 잘 읽는다. 내용을 잘 모르고 중국식 점만 있으면 헤맨다. 아예 모르는 글인데 백문이면, 당연히 순식간에 까막눈으로 전락.. 당연한 일이지만 한문은 아직 파악이 잘 되지 않는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다양한 사상을 투사했던 언어이기 때문에 하나의 언어체계라고 보기도 애매한 면이 있다. 반면 지난 200년 간의 독일어를 대하면, 그 크기가 정말 (상대적으로) 작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독일어 단어에 묻어있는 „어감“은 매우 구체적이라서, 10년 남짓한 독서경험으로도 거의 실수하지 않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 말인지 파악이 가능하다. 반면 한문은… 대부분 글자에 2천년씩 역사가 짊어지워져 있고, 다른 언어로 번역 되면서 헤게모니 변화가 이루어진 적이 없으며, 문어는 되었을지언정 결코 사어가 되지 않았고, 불경 번역을 제외하고는 근대 이전에 외국 개념어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의미론이 주로 재귀적 관계로 편성되어 있다. 독일 개념어는 대체로 희랍->라틴->중세독일어->독일어 이렇게 최소한 4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의미변천을 대략적으로 분절하여 추적할수가 있다. 실제로 훌륭한 학자들은 저 4단계 (가끔 히브리어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개념의 근원을 추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한문은 이 글자가 몇살 때(?)의 의미로 쓴 건지 알 수 있는 텍스트 내적인 징표가 하나도 없다. 결국 주해에 의지해야하고, 주해를 단 사람에 의지해야하며, 전통에 의지해야 한다. 장점이자 또 단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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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선가귀감> 번역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다.
1) 개념어 번역에서는 현대적 용어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한다.
2) 문체는 „고풍스럽고“ „선불교답게“ 한다.
3) 주석을 아끼지 않는다.
1)은 독일어->한국어 번역에서는 불가능하다시피한 일인데, 반대쪽으로는 이외의 방식을 처음부터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 신기하다. 예컨대 매우 학술적이고 명료한 „미국식“ 번역을 해볼 생각은 추호도 해보지 않았다. (미국어 싫다, 영어 말고)
한국어에는 메이지 번역어라는 거대한 장벽(이자 도구)이 있어서 창조적인 번역어를 만들어낼 여지가 희박하고, 언문(!)으로 철학을 했던 전통이 일천하여 1)을 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렇게 하려면 비트겐슈타인 <논고>의 Bild를 „얼굴“ (중세국어에서는 형상 일반을 나타내는 말)로, abbilden은 „얼굴 잡다“ 이런 식으로 해야할텐데, 아무래도 무리다. 얼마 전에 류영모/함석헌이 순우리말로 옮긴 <노자>를 보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제목부터 <늙은이> …..) 내가 모르는 19세기 한국어의 깊이를 가지고 어떤 것을 끌어낼 수 있었으리라 짐작은 해보지만, 일단 21세기의 독자인 내가 얻을 수 있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어는 2-3세기 전부터 라틴어 개념어를 거의 전부 독일어화시켜서 쓰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조작이 용이하다. 언어에 틀이 잡혀있다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철학소’로 분절이 되어 있어서 새로운 개념어를 조립하기에 좋다. 레고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문제는 원래 있는 블록으로 만들 수 없는 모양이 등장할때 발생하는 법이지만.. 반면 (한문을 버린) 한국어는 기틀이 없다. 일종의 진흙이다. 이것은 번역을 할 수 있는 재료는 될 수 없지만, 일종의 환경Umwelt를 형성해준다. 아직까지는 매우 변방에 위치하고 있지만, 중국/미국 중심체제에 대한 높은 유착으로 중심언어들과 매우 높은 연동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가 번역 대상이 된 역사는 매우 짧아서, 의미 분절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독일어의 문법구조는 매우 명료하게 해체되어 있지만 한국어의 문법구조는 한국인도 모른다. 또한 사전도 안 좋고, 어족도 동떨어져 있는데다가 어원이 잘 연구되지도 않아서 아주 중심적인 단어들도 도저히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진정한 모국어, 이상적인 메타언어인 것이다.. (조금은 반어적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경우도 많다)
이야기가 샜는데 아무튼 중요한 점은 독일어의 조작성이 높아서,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최대한 용어를 직접 주조해보려는 욕심을 실현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독일어로 번역된 불교서적을 읽으면 끔찍한 원어주의자들이 산스크리트어 용어로 책을 도배해둬서, 한줄에 한번은 발음조차 하지 못하겠는 것들이 튀어나온다. 그렇게 번역을 해두면 학문체계 내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정확성“은 얻을 수 있지만 번역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줄여버리는 꼴이 된다. 도착어를 창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 그리고 이 의미에서 변화는 „개혁“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 내재한 뒷길, 말하자면 언어 이전으로 돌아가는 길을 개척하는 일이다.
개념발생의 순간, 즉 언어가 탄생하는 순간에 언어는 언어 아닌 것과 접촉하게 된다. 이것은 규범적 언어사용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것)과는 다르다. 창조적 순간에 언어는 갑자기 가상적인 것, 변용가능한 것, 가장 가벼운 동시에 무거운 것으로 경험된다. 언어에는 구조와 물성이 있고, 일종의 마찰과 반동력이 내재하여, 언어가 아닌 것이 그것에 닿을때 완벽하게 자유로운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결을 따라서 형성되게 해준다. 언어가 아닌 것의 비율이 낮거나 미약하다면, 언어 자체가 가진 관성에 의거해서 발화가 이루어진다. 심한 경우 오히려 언어가 역류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내면 세계가 외부 언어의 구조에 의해서 경화된다. 도저히 생동감이라고는 없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의 경우, 발화의 뿌리가 자라나기 전에 이미 언어에 침식되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언어 밖에서 경험되는 것이 언어 안으로 쳐들어올때는 다르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두가지 극단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한가지는 수세에 몰린 정신이 하나의 점에 힘을 집중하여 언어의 밀도보다 높은 관통력을 발휘할 때이다. 흔히 말하는 문학은 이 방식에 가깝다. 다른 하나는 언어 자체의 가상성이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충만의 상태에서 흘러넘치는 말하기이다. 이것은 계시적 언어이다. 두 극단은 묘한 방식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려움은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온다. 가장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개념들을 번역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음心“ „법法“ „수행修行“ 같은 것이 정말로 어렵다. 사용되는 범위가 넓어서 잘 상응하는 독일어 단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내가 실제로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의 뜻은 알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말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그 반대편을 알아야 한다 (무엇에 대비해서? im Gegensatz wozu?). 루만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구분의 일부로 이 의미가 움직이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대척점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마음에는 „외부“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에게 가장 가까운 것에 대비시켜서 분화한다면 „몸“이 있겠다. 마음에게 몸은 특별한 장소이지만, 또 ㅏ 다르고 ㅗ 다른 정도로밖에는 다르지 않다. 히브리어를 배웠던 경험을 적용하여 모음을 없애보면, 맘과 몸은 둘다 m’m으로, 결국 뿌리(Radikal)가 같은 단어로 보인다.. 철학적으로는 마음의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어서 개념화가 가능한데, 이것이 능소能所의 구분이다. 보는 자, 그리고 보는 바 사이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서양 근대 철학의 주관-객관의 구분과는 다른데, 객관이 „마음 외부의 것“이라는 생각불가능한 것을 존재론적으로 상정하는 한편, 마음에 대한 분화는 다시 마음 안에서 그 대립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립의 사라짐을 깨달음(진리)라고 놓으면, 이 체계 전체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 수 있다. 개념분화의 차이, 그 이유를 조금 더 따져보자면 종교적 체험의 위치가 고대 그리스처럼 인간의 외부(자연력)이었는지, 인도-중국처럼 인간의 내면이었는지에 따라서 개념체계가 형성되는 경향이 달랐던 것도 같지만, 여기까지 가면 추측일 뿐이다.
마음은 모든 것을 담는 것이지만 또 그 안에 담긴 각각의 것이 서로 구분되게 하는 원인이다. 마음 속에 없는 것은 없지만, 마음과 같은 물건은 없다. 이것은 신학으로 보자면 신에 해당하는 위치다. 그렇다면 마음을 신Gott 으로 번역해야 하나? 예수회가 처음으로 중국에서 선교를 펼치면서 한문 문헌을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할때, 도道를 신으로 번역했던 것과 같이, 이것은 이해인 동시에 오해가 될 것이다.
마음의 번역어에 대해 물었더니 한문을 가르치는 독일 교수는 그냥 어원을 멍청할 정도로 따라서 Herz(심장)으로 해야 한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한문 텍스트의 경우에는 정당한 일이다. 언해문에서는 항상 „마음“으로 옮기는데, 그 의미는 물론 신체기관 „심장“이 아니다. Herz 역시 독일어에서 „마음“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예컨대 „그는 마음이 넓다“라고 말하려면 „그는 큰 심장을 가졌다Er hat ein großes Herz“라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마음이 아프다“를 „Mir tut das Herz weh“라고 말하면 병원을 알아봐줄 것이다. „마음“은 실제로 „신“에 해당하는 개념적 „크기“를 가지고 있다. „신“이 차지하는 개념적 위치는 근대화를 거친 이후의 서양 언어에서는 좋게 말하면 유보되어 있고 나쁘게 말하면 손상되어 있어서 여기에 넣을 수는 없다. „부처“같은 말을 „신“의 위치에 넣으면 감성적인 저항이 온다 (신성모독이 아니라 정확히 반대의 감각, 즉 신을 되살리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수행“같은 개념도 번역이 매우 까다롭다. 수행은 개별자가 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하는 비개념적 작업이다. 이는 예컨대 „명상Meditation“이 아니다. 나는 처음에는 Einüben을 쓰고 있었는데,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책 제목인 „Einübung ins Christentum“에서 따온 것이다. 연습Üben을 통해서 안으로ins 들어ein-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수행 개념과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역시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점 („도를 닦다“도 목적어가 있지만 도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외적 존재자가 아니다)이 거추장스럽고 맞지 않는 것 같다. 관음선 계열에서는 practice, praktizieren를 사용하는데, 숭산 스님이 수행을 이렇게 번역했던 것 같다. Theorie-Praxis 에서 오는 좋은 대립구도도 있다. 그러나 praktizieren은 어감이 너무 인공적이라는 극단적인 단점이 있다. 16세기에 절대로 썼을 단어가 아닌 것이다. 한문 교수는 pflegen(가꾸다, 돌보다, 고치다)가 좋다고 했다. pflegen은 핵심 의미는 원래 상태를 잘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은 원래 상태를 완벽하게 뒤바꾸거나, 시작 상태를 파괴해버릴 수도 있다. <육조단경>에 나오는 신수-혜능의 게송 배틀은 바로 수행이 pflegen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며칠 전부터 사용하게 된 단어는 läutern, Läuterung(정화, 제련하다)이다. lauter는 예전에 hell 과 같은 의미, 즉 „맑다, 밝다“였다. 탁한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과정이고, 종교적 문맥에서도 사용된 예시가 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반쪼가리 문장은 서문에 나오는 „…dass es sich zum Geist läutere“ (그리하여 정신을 향해 정화될 수 있도록)이다.
아무튼 이런 고민은 끝이 없지만, 개념을 정말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번역 작업은 큰 특권이다. 사실 번역을 하지 않고서 개념을 제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을 정도다. 언어 전체와 개념어 사이의 관계 („개념의 좌표“)가 드러날 때가지 헤매야, 다른 언어 내에서 비슷한 위치를 찾을 수가 있다. 어원적 접근은 좁은 „지금“의 언어에서 벗어나서, 말하자면 시선을 들어올려서 언어의 풍광을 보게 해주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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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의 번역에 대한 것은 다음번에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선가귀감 <상권>을 끝마치자, 마지막 목판에 새겨져있는 시주자의 명단이 나왔다.
시주를 많이 한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모양인지 위쪽에 새겨져 있고, 이름도 박운희, 구희복 처럼 정상적인 한문 이름들이다. 아래로 내려오면 가난한 불자들이 없는 살림에 시주를 한것이 느껴지는데, 이름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을 몇개 적어본다.
이팔년. 한두리동. 돌덕. 덕개. 조어리동. 막세. 개이. 최끝동. 춘배. 문이.
성도 가져보지 못한 무지렁이 돌덕, 덕개, 춘배가 몇푼씩 모아준 돈으로 이 목판이 새겨졌고 그 결과물을 오늘 내가 독일에서 보고 있다는 것은 특별하다. 그들은 이 목판이 담은 말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무리 언해문이라고 해도 한문이 절반이니 말이다. 나아가 그들은 이런 법문이 필요없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상처입은 현대인의 비밀스러운 취미, 낭만주의만은 아니다. 나무꾼 혜능이 <금강경> 독송을 한마디 듣고 깨쳤을 때는 글 한자 모르는 까막눈이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장 가치있는 것들이 전문가가 아니라 그 외부에 있는 다른 힘을 통해 유지된다고 느낄때가 많다. 그것이 철학, 종교, 예술 중의 어떤 것이든간에, „바보“들이 그것을 떠나면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면 썩어들어간다. (엘리트가 없어도 작동하지 않겠지만) 내가 본 최고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시골이나 변방에서 자란 튼튼하고 억센 사람들이었다. 변방, 부드러운 모름, 별 생각없는 웃음을 생각한다. 변방에서, 계급도 직업도 없는 곳에서, 임시로 지은 집에서 모닥불에 토란을 구워먹으면서, 모두들 서로 만난다. „거울을 깨뜨리고 서로 만난다“라고 선에서 말하듯이 그렇게.
‚거울을 깨뜨리고 다시 만난다.‘
매 순간 와장창이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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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번역 작업물은 전쟁일기를 만나게 처음이었는데 여전히 꾸준하게 관련 일을 하고 계신가 보네요. 앞으로도 번역본을 만드는 일 하실건가요? 선생님이 번역하신 비트겐슈타인 책이 보고싶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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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앞으로 당분간은 방향을 바꿔서 한국어->독일어 번역 작업을 해볼 계획이지만 머지 않은 미래에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저작들도 번역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응원의 말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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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잘 읽고, 마지막 문단 꼭꼭 씹어먹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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