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어쩌면 9년만에 수도원 보이론Beuron에 돌아왔다. 철학 학부생이자, 망가진 세계에 어딘가에 남아있을 종교를 발견하고자 무던히도 애쓰던 이십대의 B와 나는 이곳에서 세번의 봄을 보냈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몇번의 극적인 순간들과 병적인 시간들을 지나, 스스로의 눈이 약간이지만 깊어진 것을 느꼈다. 수도원과, 근처를 감싼 자연이 내뿜는 고요함이 아주 직접적으로 마음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공기라고 부르고, 코로 들이마셨다가 입으로 내뱉는다. 우리는 그것을 분위기라고 부르고, 눈썹과 어깨와 손가락으로 그것과 교감한다고 생각한다. 소리가 없어야 고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요는 아주 오래된 것이고, 소리보다 오래되었고, 종소리 속에도 있고 새들의 지저귐 속에도 있다. 도나우가 흐르면서 어떤 소리를 낼때, 그리고 우리가 그 소리에 이름을 붙이기를 잠시 망설일 때, 그 망설임 속에 또 고요가 있다.
고요함이 나를 통과해서 지나갔다. 모든 것이 같지만 다르게 보였다.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도나우를 따라서 걷는다. 예전에 암초였던 거대한 바위들이, 알프스가 융기하고 나서는 도나우 강변을 병풍처럼 두른 암벽이 된다. 아무도 살지 않는 이 골짜기 사이로는 항상 빛과 바람과 물이 흐른다. 다섯 시간을 내리 걸어도 사람 한명 만나기 어렵다.

이튿날은 흐렸다. 높은 곳에 올라간 우리의 마음은, 구름 낀 하늘에서 서치라이트처럼 지상을 비추는 빛줄기를 따라 멍하니 여기저기를 따라다녔다. 돌아와서 바보 같은 글을 세편 썼다.
움직이는 빛
구름을 뚫고서 떨어지는 빛이 숲의 한 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산정에서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 중에 단 한 곳에만 황금색 빛의 은총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완벽하게 잠든 세상에서 홀로 깨어있는 외롭고 빛나는 영혼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이름이 없어 침묵 외의 선택지가 없는 수많은 정신 가운데서 한명의 위대한 천재가 나타나는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역사의 무심한 흐름 속에서,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의 땅이,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도시가, 하나의 가문이, 이윽고 한 명의 개인에게 빛이 모아지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잿빛 그림자 속에 잠겨있던 전나무와 참나무들이 온 힘을 다해 생명의 목소리를 내지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빛은 또 움직인다. 마치 풀이 자라나는 소리를 듣듯, 모든 감각을 열고 바라보면, 빛은 아주 미세하게 형태와 밝기를 바꾸면서 호흡하고 있다. 이는 천재의 약동이다. 그는 운명이 열어주는 대로 빛을 받아들이고, 원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주어진 만큼만 빛난다. 주어진 만큼의 환희를 내보이는 일은 적정을 지키는 일이다. 여기까지는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빛이 오른쪽 능선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을때, 나의 입은 충격으로 벌어졌다. 지금까지 빛을 비추어 생명과 색깔과 무늬를 부여했던 작은 장소는 이미 그림자와 침묵 속으로 돌아갔다. 그 갑작스런 죽음, 때이른 수면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천재는 이처럼 주어진 빛이 끊기고 나면 후회없이, 미련 없이 어둠 속으로 돌아갈 줄 아는구나. 내가 이렇게 생각의 그루터기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빛은 이미 수십, 수백의 새로운 천재들을 낳았다가 다시 미생전의 부동 속으로 돌려보냈다. 빛의 얼룩은 잦아들었다가, 눈부시게 화려해졌다가, 넓어졌다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어졌다가, 빠르게 움직이다가, 영영 머물듯 하다가, 전나무가 되기도 하고 전나무 위에 앉은 새들이 되기도 하고, 소리가 되기도 하고 물기가 되기도 하면서 움직였다. 목적의 굴레가 씌워지지 않은 생각이 사슴뿔처럼, 나무가지처럼 하늘을 향해 굳건하게 자라나듯이, 나는 그 움직임을 아래에서 위로, 무릎에서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아름답다, 이렇게 친구에게 말했다가, 말이 순식간에 숯덩어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공기가 너무 뜨거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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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불
살아있는 불이 보고 싶었다. 유리 안에 갇힌 불이 아니라 진짜 불, 혀를 날름거리면서 어둠을 할퀴는 위험한 불을 보고 싶었다. 우리는 예전 물레방앗간이 있던 곳까지 걸어가서 모닥불을 피우기로 했다. 전에 근처를 걸을때 그곳에서 누가 불피운 흔적을 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을 뒤로 하고 도나우 강을 따라 걷다 보니 벌써 하늘이 회색에서 검회색으로, 회색에서 검은색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구름 탓에 별도 없고 달마저도 그믐이다. 그나마 빛나는 것은 모래가 드러난 길, 넓은 초지, 그리고 강물 위에 떠있는 백조 두마리. 인적은 어느 곳에도 없다.
30분 가량을 걸으면 첫번째 불빛이 보이는데, 이것은 기차가 통과하는 터널 입구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누런색 신호등이다. 그 다음에 암벽을 끼고 왼쪽으로 꺽어지는 길로 들어서면, 다시 암흑이다. 발 밑의 하얀 길 위에 검은 얼룩들이 드문드문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밤이면 유난스럽게 움직임이 많아지는 개구리들이다. 도나우의 개구리는 색이 어둡고 몸집이 크다. 아직 삶의 의미를 취조당하는 고난의 시간이 찾아오지는 않았는지, 개굴거리는 소리는 내지 않고, 그저 밤을 뚫고 이쪽 저쪽으로 펄쩍펄쩍 뛰어다닐 뿐이다. 사람이 있건 말건 신경쓰지 않는다. 해가 진 후에도 한참을 가지 위에 앉아 재잘거리던 새들의 소리도 모두 잦아들었다. 새들이 꿈을 꿀때, 거기에 등장하는 소리는 서로의 지저귐일까, 강물의 소리일까. 숲 속에서 느껴지는 새들의 잠은 깊었다.
숲이 우거진 구간에 들어설때, 우리는 누군가가 지켜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큰 어둠이 입을 벌리고 우리를 보고 있었고, 그건 아주 오래된 무서움을 일깨웠다. 오래도록 쓰지 않았던 근육을 쓰면 그 존재 자체가 놀라운 것으로, 기쁜 것으로 다가오듯이 나는 본능적인 무서움을 얼얼하게 느끼면서 바라보았다. 무서움은 가슴 주위에, 어깨와 목덜미를 안고서 떨어지지 않았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후두둑, 소스라치며 오른편을 바라보자 오리 두마리가 물을 차면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우리의 설익은 공포가 너무 시끄러웠던 것일까?
20분 정도를 더 걸으면 이 여정의 처음이자 마지막 집이 나타난다. “사냥꾼의 집”으로 알려져있는 곳인데, 제법 3층짜리 튼튼한 집에, 소 20 마리가 들어가는 외양간도 갖추고 있다. 밤에 보니 사냥꾼의 집의 창문너머로는 낡은 가재도구들이 보였고, 윗층에는 죽은 동물들의 뿔과 털이 벽에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짐승의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땅에는 예전부터 숲속에서 짐승을 지배하고 연기에 고기를 그슬리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의 마음은 생각컨대 갈색으로, 말없이 숲을 헤치면서 신중하고 영리한 덫과 쇠붙이로 목숨을 빼앗고, 그 죄를 갚을 길이 없어 점점 더 말이 없어지던, 다부지고 어두운 몸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검은 하늘을 더욱더 검게 물들이는 먹구름들이 보였다. 바람인지 빗방울인지 모를 미세한 것들이 뺨을 스쳤다. 나보다 기민한 땅이 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냄새를 보내준다. 10분만 더 가면 모닥불터가 있을텐데, 우리는 힘을 내서 먹구름이 다가오는 쪽을 향해 걸어보기로 한다. 다시 한번, 우리는 숲의 어둠에 삼켜진다. 이때, 왼편 비탈에서 무언가 큰 짐승이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너무 어두워서 윤곽을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황급하게 비탈을 올라갔다. 우리는 돌이 된 것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모든 짐승 중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보이지 않는 짐승이다. 상상력이 그것에게 발톱과 이빨과 뿔과 날개를 달아주기 때문이다. 짐승이 없어진 후 조심조심 행군을 계속했다. 한차례 고비를 넘기고 드디어 물레방앗간터가 눈 앞에 드러난 순간,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사방에 떨어졌다. 구멍처럼 깊은 침묵 속을 걸어온 우리는 보이지 않는 짐승의 습격에 이어 타악기처럼 시끄러운 소나기를 만나자 남은 사기가 전부 떨어졌다. 어서 몸을 돌려 불빛을 향해 걸었다. 빗발 사이로 어두운 집이 나타났다. 사냥꾼이 장작을 태우는지,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보였다. 뇌우라도 만나면 저 수상한 집에 잠시 도움을 요청해야 할텐데, 웬만하면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냥꾼은 불을 다루고 불을 자르고 불을 거느릴 것이다. 저 숲의 짐승들은 형태가 없어지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운이 나쁘면 사냥꾼의 불화살에 불이 타들어갈 것이었다. 우리 역시 짐승이었던 때가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불이 무서웠다. 우리는 사냥꾼의 집을 말 없이 지나쳤다. 벌써 먼 하늘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살아있는 불을 보려는 우리의 목적은 이처럼 소나기 속을 황급하게 걸으면서 이루어졌다. 춥고 젖은 밤 속에도 불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안에도 어두운 짐승이 산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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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메
가슴이 답답하였다. 괜히 두어번 도나우를 건너보기도 하고,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마음이 무언가에 눌려있었는데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오후 기도 Vesper에 갔다. 기도책을 폈다. 사순절 3주차 수요일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았다:
Miserere mihi, Domine, quoniam infirmus sum: sana me, Domine.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제가 병들어 죽어가나이다: 저를 고쳐주소서, 주님.
Conturbanta sunt omnia ossa mea: et anima mea turbata est valde.
저는 온몸이 전부 으스러졌나이다: 또한 제 마음은 아주 어지럽나이다.
라틴어 기도문에는 독일어에 없는 따뜻함과 절절함이 있다. 저를 고쳐주소서 “sana me(사나 메)” 는 마치 병든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부르는 것처럼 부드럽고 나약하다. 독일어 “heile mich(하일레 미히)”는 반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뻣뻣한 구석이 있다. 독어를 말하는 동안은 허리가 잘 굽혀지지 않는다. 대중과 분리된 제단쪽 공간으로,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들이 걸어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늙고 온몸이 으스러져가는 수도사들은 때로는 다리를 절면서, 때로는 텅빈 시선을 하고 겨우겨우 의자까지 도착한다. 평생 라틴어 기도문을 노래한 덕인지 제단 앞을 지날때 허리가 깊게, 유연하게 숙여진다. 높은 제단에 촛불 세 촉이 켜진다.
칸토어Cantor의 목소리가 맑다. 한 마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숨을 늦추고 공기의 떨림 속에 머무르는 것이 대단하다. 그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나는 자꾸 가슴이 아파왔다. 나으려는 모양이다. 병들고 온몸이 으스러져가는 나를 낫게 해주시려는 모양이다. 어차피 기도문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냥 가슴을 찌르는 목소리와 웅성거리는 답가를 들으면서 앉아있었다. 나쁜 피가 흘러나오듯이, 마음은 계속해서 욱신거리다가, 기도와 함께 통증도 멈추었다. 밖에 나와서 안개를 보았다. 안개 뒤에, 보이지는 않지만, 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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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멋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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