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 20170217

글이 풀리지 않아서 도서관 앞 영국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영국정원Englischer Garten은 영국식englisch이기도 하지만, 천사적engelsch이기도 하다. 프랑스식 공원에 비해서 영국식 공원은 자연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다. 모든 것이 자연인데, 자연을 "본따는 것"은 무슨 뜻인가? 글을 쓸 수 있는 때가 있고 없는 때가 있다. 일생의 대부분을 글을 쓸수 있는 상태로 보낸 사람들은 대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나는 … Weiterlesen 잡상 20170217

사진과 마음

나는 학창시절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내 돈 주고 샀던 첫 카메라가 올림푸스의 C-220z 였는데, 아직도 수학여행에는 일회용 카메라가 대세였던 당시에 이런 카메라는 상당히 혁신적인 물건이었다. 아버지와 형의 영향으로 나는 전자기기에 대해서만큼은 얼리어탑터였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음악기기가 워크맨도 아니고 CDP도 아닌, MPman이라는 당시 최초의 MP3플레이어였다는 사실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지금보면 … Weiterlesen 사진과 마음

한해의 끝

올해는 이상한 해였다. 사실 올해가 한국에 "다녀온" 시간 전체를 대표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길고 긴 시간이 하나로 쪼그라들어서 손바닥 위에 얹힌 느낌이다. 나는 시간을 꿰뚫어보지는 못하지만, 한 눈에 쥐고 쳐다볼 정도로 멀리까지 오는데는 성공했다. 그 시간의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윤곽은 이제 어슴푸레 볼 수가 있다. 2013년 3월부터 2016년 7월까지 한국에 있었으니, 총 40개월을 보냈다. … Weiterlesen 한해의 끝

잡상 2016년 10월 12일

잘 모르겠다. 철학이라는 말은 탈리스만처럼 나를 나쁘고 불순한 것들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는데, 정작 대학의 강의계획서들을 읽어보니 내가 하는 일이 철학이 맞는지 의심이 되었다. "니체와 소크라테스의 싸움" 세미나 말고는, 진심으로 관심이 가는 철학과 과목이 단 한개도 없었다. 결국 비교문학과의 "번역이론의 문제" 강의, "번역이론들" 세미나, "하이데거의 숲길" 세미나를 듣기로 했다. 종교학과의 "식민주의와 종교" 강의를 듣기로 했다. 이번 학기에 … Weiterlesen 잡상 2016년 10월 12일

도착에 걸리는 시간

불안하고 자신감 없는 상태에서 이 나라로 돌아왔다. 나는 무얼해야 할지 몰랐고 그것은 올바른 감각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워했고 그것은 잘한 일이었다. 알 수 없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고,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없는 것nichts"을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얼하러 온 것이 아니다. 장소와 언어를 바꾸는 것은, 음식과 공기를 바꾸는 것은, 부모와 연인을 바꾸는 것은 의지나 계획과 같은 얄팍한 말로 … Weiterlesen 도착에 걸리는 시간

잡상 20160714

혼자라는 말을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3년반은, 요약하자면, 혼자가 아닌 세상과의 만남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끊겨있던 모국어와의 재회였고, 언어의 중앙에 설 수 있는 기회였다. 사람들은 나를 무서워 하지 않았고, 멀게 느끼지 않았고, 사람들은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배척하기도 했다. 나를 조종하려고 하거나 변화시키려고 했다. 수많은 뿌리들이 내 안을 움켜쥐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흙이 되었다는 느낌이 … Weiterlesen 잡상 20160714

잡상 2016 06 15

시간이 흐르고 있다. 군대라는 공간을 떠난지 2주일이 되었고, 떠나고보니 내가 얼마나 그곳에서 괴로워했었는지 알겠다. 마지막 한 해는 상당히 힘들었다. 자폐적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수업을 하러 부대에 다시 들어갈 때마다 온몸이 경직되는게 느껴진다. 스스로와 약속했기 때문에 나는 수염을 자르지 않았고, 부대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나를 경이롭게, 경멸스럽게, 경악스럽게 쳐다본다. 나는 반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썼지만 하나도 자유롭지 … Weiterlesen 잡상 2016 06 15

2010년의 노트들

2010년 9월 즈음의 일기를 보고 있다. 이때 나는 다시 없을 정도로 강렬한 사랑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석사논문을 열심히 썼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온갖 감정으로 넘치면서도 끝없이 이성에 의지하려는 모습이, 뭐랄까 안타깝다.   노트 한구석에 대단찮은 시도 적혀있다   Die Mädchen lachten; Mir war zumut Als hätt ich schon längst das Leben mit verschwendet.   여자애들이 … Weiterlesen 2010년의 노트들

모름의 기술

  모든 철학의 기술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강력한 것은 모름이다. 그리스인은 이것을 경이taumazei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철학의 목적은 진리의 체험이다. 모름을 익히고 행하는 것과, 진리를 체험하는 것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가? 방법에서 목적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모두 끊어진 느낌을 우리는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가짜는 아니다. 모름이 빛을 주는 방식이 바로 철학의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면서 살아가고, 알지 … Weiterlesen 모름의 기술

헛것

  철학을 하다보면 우리는 분절되지 않은 웅얼거림을 내뱉고 싶은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빌려온 지혜이다) "정당화"나 "설득"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유약한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나는 투쟁과 논쟁에 진심으로 임해본 적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근본적인 경험은, 그럴 필요가 있을때 조차,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보도록 해주었다. 길게 설명하는 글을 … Weiterlesen 헛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