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단상

여름이 가고도 모자라서 11월이 오고 한해의 마지막이 오고 감기까지 걸리고서 나서야 겨울이구나, 생각한다. 트라클의 시 중에서 schwarze Novemberzerstörung이라는 시어가 있다. "검은 11월의 파멸"라는 뜻이다. 독일인이 11월을 떠올리면 마음속에 들리는 음악을 이렇게 파괴적으로 담아낸 싯구는 두번 다시 없을 것 같다. 저녁기도 무렵 이방인은 자신을 잃어버린다, 검은 11월의 파멸 속에서,삭아버린 나뭇가지 아래에서, 나병 고름 가득한 성벽을 걸으면서,예전 … Weiterlesen 11월 단상

남는 자리, „선가귀감“ 독일어 번역

새 블로그에 처음으로 글을 쓴다. 페이스북을 매장해버리고 나서 (연락 용도 때문에 아직 완전히 매장하지는 못했다) 마음에 많은 시간이 남게 되었다. 헛생각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발화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이 있다. 세상에 뱉은 말은 유령처럼 계속 나한테 돌아오는 것 같다 뭐 그런 느낌 이렇게 워드프레스의 인터페이스로 글을 쓰고 있으면 좋아요와 댓글과 메시지를 받을 전망이 … Weiterlesen 남는 자리, „선가귀감“ 독일어 번역

그리스 여행기 #1

새벽에 뮌헨 공항을 떠나, 이스탄불을 경유해서 아테네의 숙소에 도착하자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서울에서 오신 아버지는 에어비엔비에 몇시간 전에 이미 도착해서, 아카시아 나무가 드리운 발코니에서 브루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을 읽고 계셨다.   나는 그리스의 공기를 처음으로 마시고, 햇빛을 처음으로 쬐었다. 아무런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남의 집에 앉아 있었지만 내 집처럼 편안했다. 위험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 자체가 무언가로 가득 … Weiterlesen 그리스 여행기 #1

잡상 2016 06 10

페이스북이라는 공간을 지켜보면서 나는 점점 입이 돌처럼 변해갔다. 모든 말을 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모든 종류의 말이 다 있어서 딱히 말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이 감각에서 나온 첫번째 반응은, (전보다도 더 높은 비율로) 실없는 소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단둘이 이야기를 하거나, 친밀한 분위기가 조성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아예 … Weiterlesen 잡상 2016 06 10

휴일

엉망인 시간들을 보내다가, 겨우 헤집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바깥에는 처음 보는 것 같은 색들이 있었다. 여름이 다 지고나니 그 색깔을 알아보겠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들고 나왔었다. 그 동안은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여력이 없었음을 알았다. 그냥 지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막다른 곳에 다다라서야 하게 된다. 꿈꾸듯 명상적인 기분은 지하철에서 … Weiterlesen 휴일

비트겐슈타인 번역에 대해 (4)

4. "명제"의 번역에 대해서: "논고"와 "탐구"의 관계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있다. 그런 말은 침묵보다 못하다.” “논고”의 기본태도는 철저하게 윤리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윤리적이고, 예술가적이고, 종교적이고, 신비적이라는 것은 민감한 독자라면 누구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집필할 것은, 전통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속하던 “진리”가 자연과학에 덧씌워지는 과정에 대한 윤리적인 반응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 Weiterlesen 비트겐슈타인 번역에 대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