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단상

여름이 가고도 모자라서 11월이 오고 한해의 마지막이 오고 감기까지 걸리고서 나서야 겨울이구나, 생각한다. 트라클의 시 중에서 schwarze Novemberzerstörung이라는 시어가 있다. „검은 11월의 파멸“라는 뜻이다. 독일인이 11월을 떠올리면 마음속에 들리는 음악을 이렇게 파괴적으로 담아낸 싯구는 두번 다시 없을 것 같다.

저녁기도 무렵 이방인은 자신을 잃어버린다, 검은 11월의 파멸 속에서,

삭아버린 나뭇가지 아래에서, 나병 고름 가득한 성벽을 걸으면서,

예전 그의 성스러운 형제가 걸었던 곳,

광기의 달콤한 현악에 빠졌던 곳에서.

<헬리안Helian>

독일식으로 생각하면, 큰 고통은 그 고통을 초월하는 움직임으로 이끈다. 이 초월의 방식은 동양적으로 보면 달관이나 해탈이겠으나, 독일적으로 보면 광기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예감했던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재림 역시, 큰 내적 고통을 무화시키는 더욱더 강대한 힘에 대한 것이다. 고통이 없는 곳은, 고통과 기쁨의 구분이 사라져버린 공간이다.

그렇기에 트라클은 가장 큰 아픔과 직면하면서, 생명도 썩어버리고 역사(성벽)도 곪아버린 허무의 지점에 이르러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자신을 잃어버린 곳에서 그가 만나는 것은 무無가 아니다. 그것은 „성스러운 형제“란 말로 가려진 시적 우상 횔덜린이며, 그가 상징하는 광기와 음악이 하나된 초월적 순간이다. 광기의 달콤한 현악에 귀기울일수밖에 없을때, 아픔은 사라진다.

물론 „현대 독일인“에게 이런 „고전적 독일“은 너무나 낯설다. 산업화와 민족주의라는 근대의 질병들과 합쳐졌을때 일어났던 살인적 광기에 대한 트라우마적 기억 탓이다. 트라우마의 성격상 광기는 이제 부인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제 반대급부로 독일인을 지배하는 것은 계산적 이성, 그 중에서도 냉소이다.

같이 „문화간 신비주의?“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하는 T교수와 점심을 먹다가, „고전적 독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한국에 있던 시절에 헤르만 헤세를 읽으면서, 독일에 가면 라틴어로 시를 짓는 아이들이 있을줄 알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자 껄껄 웃었지만, 물론 그도 몇 남지 않은 고전적 인간이기 때문에 슬픔이 담겨있었다. 그 역시 남부 티롤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자란 사람이다. 내가 다닌 학교도 예전에 베네딕트 수도원 건물이었고, 내가 갔을때는 예수회 소유였다. „고전적 독일문화를 한마디로 하자면“ T 교수가 말했다. „비이성적인 것을 추구하되, 이성적인 수단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는 점이지“

세미나를 계기로 그가 나를 동료로 대해주고는 있지만 항상 그에게 감탄한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나는 숨기지도 않는다.

철학을 그 고대 그리스적 원천을 통해서 정의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해야하는가, 하는 논의가 이어졌다. 그는 모범적 고전적 인간답게 로고스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로고스, 즉 담론적, 논리적 요소가 중심적이어야 철학이라는 것이다. 나는 평소의 마음대로 „총체성을 의도하는 언어가 즉 철학 아닌가“라고 쳐보았다. 그의 두뇌회전은 아주 빠르기 때문에 1초 정도 생각하더니 „그러면 신화도 철학이어야 한다“라고 반론했다. 훌륭한 반격이었지만 나는 신화도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0의 대미지를 입었다.. 가 아니라 이 반론은 내가 박사논문에 있어서 큰 고민과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초만에 내 논문을 망가뜨려줘서 참 감사합니다..

고민을 하다가 해결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의 두뇌는 더 열심히 일을 하는 대신에 감기에 걸리는 쪽을 택했다. 생각이 아닌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강제한 것이다… 아무튼 그때부터 닷새째 일을 못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아픈 시간이 싫지 않다. (억지로 하는) 명상과 비슷하다고 생각을 많이 한다. 확실히 뇌의 분석적 부분들이 작동을 안하고 아주 기본기능만 할때 오는 깊은 치유적 효과가 있다. 아플 수 있다는 사실도 고맙게 여겨질때가 있다. 지금처럼, 이상하고 어두운 곳에 누가 흘린 액체처럼 누워있다가 서서히 단단함이, 힘이 돌아올때가 그렇다.

보이론 수도원 #1


8년, 어쩌면 9년만에 수도원 보이론Beuron에 돌아왔다. 철학 학부생이자, 망가진 세계에 어딘가에 남아있을 종교를 발견하고자 무던히도 애쓰던 이십대의 B와 나는 이곳에서 세번의 봄을 보냈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몇번의 극적인 순간들과 병적인 시간들을 지나, 스스로의 눈이 약간이지만 깊어진 것을 느꼈다. 수도원과, 근처를 감싼 자연이 내뿜는 고요함이 아주 직접적으로 마음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공기라고 부르고, 코로 들이마셨다가 입으로 내뱉는다. 우리는 그것을 분위기라고 부르고, 눈썹과 어깨와 손가락으로 그것과 교감한다고 생각한다. 소리가 없어야 고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요는 아주 오래된 것이고, 소리보다 오래되었고, 종소리 속에도 있고 새들의 지저귐 속에도 있다. 도나우가 흐르면서 어떤 소리를 낼때, 그리고 우리가 그 소리에 이름을 붙이기를 잠시 망설일 때, 그 망설임 속에 또 고요가 있다.

고요함이 나를 통과해서 지나갔다. 모든 것이 같지만 다르게 보였다.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도나우를 따라서 걷는다. 예전에 암초였던 거대한 바위들이, 알프스가 융기하고 나서는 도나우 강변을 병풍처럼 두른 암벽이 된다. 아무도 살지 않는 이 골짜기 사이로는 항상 빛과 바람과 물이 흐른다. 다섯 시간을 내리 걸어도 사람 한명 만나기 어렵다.

이튿날은 흐렸다. 높은 곳에 올라간 우리의 마음은, 구름 낀 하늘에서 서치라이트처럼 지상을 비추는 빛줄기를 따라 멍하니 여기저기를 따라다녔다. 돌아와서 바보 같은 글을 세편 썼다.

움직이는 빛

구름을 뚫고서 떨어지는 빛이 숲의 한 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산정에서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 중에 단 한 곳에만 황금색 빛의 은총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완벽하게 잠든 세상에서 홀로 깨어있는 외롭고 빛나는 영혼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이름이 없어 침묵 외의 선택지가 없는 수많은 정신 가운데서 한명의 위대한 천재가 나타나는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역사의 무심한 흐름 속에서,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의 땅이,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도시가, 하나의 가문이, 이윽고 한 명의 개인에게 빛이 모아지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잿빛 그림자 속에 잠겨있던 전나무와 참나무들이 온 힘을 다해 생명의 목소리를 내지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빛은 또 움직인다. 마치 풀이 자라나는 소리를 듣듯, 모든 감각을 열고 바라보면, 빛은 아주 미세하게 형태와 밝기를 바꾸면서 호흡하고 있다. 이는 천재의 약동이다. 그는 운명이 열어주는 대로 빛을 받아들이고, 원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주어진 만큼만 빛난다. 주어진 만큼의 환희를 내보이는 일은 적정을 지키는 일이다. 여기까지는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빛이 오른쪽 능선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을때, 나의 입은 충격으로 벌어졌다. 지금까지 빛을 비추어 생명과 색깔과 무늬를 부여했던 작은 장소는 이미 그림자와 침묵 속으로 돌아갔다. 그 갑작스런 죽음, 때이른 수면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천재는 이처럼 주어진 빛이 끊기고 나면 후회없이, 미련 없이 어둠 속으로 돌아갈 줄 아는구나. 내가 이렇게 생각의 그루터기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빛은 이미 수십, 수백의 새로운 천재들을 낳았다가 다시 미생전의 부동 속으로 돌려보냈다. 빛의 얼룩은 잦아들었다가, 눈부시게 화려해졌다가, 넓어졌다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어졌다가, 빠르게 움직이다가, 영영 머물듯 하다가, 전나무가 되기도 하고 전나무 위에 앉은 새들이 되기도 하고, 소리가 되기도 하고 물기가 되기도 하면서 움직였다.  목적의 굴레가 씌워지지 않은 생각이 사슴뿔처럼, 나무가지처럼 하늘을 향해 굳건하게 자라나듯이, 나는 그 움직임을 아래에서 위로, 무릎에서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아름답다, 이렇게 친구에게 말했다가, 말이 순식간에 숯덩어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공기가 너무 뜨거웠던 것이다. 

움직이는 불

살아있는 불이 보고 싶었다. 유리 안에 갇힌 불이 아니라 진짜 불, 혀를 날름거리면서 어둠을 할퀴는 위험한 불을 보고 싶었다. 우리는 예전 물레방앗간이 있던 곳까지 걸어가서 모닥불을 피우기로 했다. 전에 근처를 걸을때 그곳에서 누가 불피운 흔적을 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을 뒤로 하고 도나우 강을 따라 걷다 보니 벌써 하늘이 회색에서 검회색으로, 회색에서 검은색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구름 탓에 별도 없고 달마저도 그믐이다. 그나마 빛나는 것은 모래가 드러난 길, 넓은 초지, 그리고 강물 위에 떠있는 백조 두마리. 인적은 어느 곳에도 없다.

30분 가량을 걸으면 첫번째 불빛이 보이는데, 이것은 기차가 통과하는 터널 입구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누런색 신호등이다. 그 다음에 암벽을 끼고 왼쪽으로 꺽어지는 길로 들어서면, 다시 암흑이다. 발 밑의 하얀 길 위에 검은 얼룩들이 드문드문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밤이면 유난스럽게 움직임이 많아지는 개구리들이다. 도나우의 개구리는 색이 어둡고 몸집이 크다. 아직 삶의 의미를 취조당하는 고난의 시간이 찾아오지는 않았는지, 개굴거리는 소리는 내지 않고, 그저 밤을 뚫고 이쪽 저쪽으로 펄쩍펄쩍 뛰어다닐 뿐이다. 사람이 있건 말건 신경쓰지 않는다. 해가 진 후에도 한참을 가지 위에 앉아 재잘거리던 새들의 소리도 모두 잦아들었다. 새들이 꿈을 꿀때, 거기에 등장하는 소리는 서로의 지저귐일까, 강물의 소리일까. 숲 속에서 느껴지는 새들의 잠은 깊었다.

숲이 우거진 구간에 들어설때, 우리는 누군가가 지켜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큰 어둠이 입을 벌리고 우리를 보고 있었고, 그건 아주 오래된 무서움을 일깨웠다. 오래도록 쓰지 않았던 근육을 쓰면 그 존재 자체가 놀라운 것으로, 기쁜 것으로 다가오듯이 나는 본능적인 무서움을 얼얼하게 느끼면서 바라보았다. 무서움은 가슴 주위에, 어깨와 목덜미를 안고서 떨어지지 않았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후두둑, 소스라치며 오른편을 바라보자 오리 두마리가 물을 차면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우리의 설익은 공포가 너무 시끄러웠던 것일까?

20분 정도를 더 걸으면 이 여정의 처음이자 마지막 집이 나타난다. “사냥꾼의 집”으로 알려져있는 곳인데, 제법 3층짜리 튼튼한 집에, 소 20 마리가 들어가는 외양간도 갖추고 있다. 밤에 보니 사냥꾼의 집의 창문너머로는 낡은 가재도구들이 보였고, 윗층에는 죽은 동물들의 뿔과 털이 벽에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짐승의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땅에는 예전부터 숲속에서 짐승을 지배하고 연기에 고기를 그슬리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의 마음은 생각컨대 갈색으로, 말없이 숲을 헤치면서 신중하고 영리한 덫과 쇠붙이로 목숨을 빼앗고, 그 죄를 갚을 길이 없어 점점 더 말이 없어지던, 다부지고 어두운 몸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검은 하늘을 더욱더 검게 물들이는 먹구름들이 보였다. 바람인지 빗방울인지 모를 미세한 것들이 뺨을 스쳤다. 나보다 기민한 땅이 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냄새를 보내준다. 10분만 더 가면 모닥불터가 있을텐데, 우리는 힘을 내서 먹구름이 다가오는 쪽을 향해 걸어보기로 한다. 다시 한번, 우리는 숲의 어둠에 삼켜진다. 이때, 왼편 비탈에서 무언가 큰 짐승이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너무 어두워서 윤곽을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황급하게 비탈을 올라갔다. 우리는 돌이 된 것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모든 짐승 중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보이지 않는 짐승이다. 상상력이 그것에게 발톱과 이빨과 뿔과 날개를 달아주기 때문이다. 짐승이 없어진 후 조심조심 행군을 계속했다. 한차례 고비를 넘기고 드디어 물레방앗간터가 눈 앞에 드러난 순간,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사방에 떨어졌다. 구멍처럼 깊은 침묵 속을 걸어온 우리는 보이지 않는 짐승의 습격에 이어 타악기처럼 시끄러운 소나기를 만나자 남은 사기가 전부 떨어졌다. 어서 몸을 돌려 불빛을 향해 걸었다. 빗발 사이로 어두운 집이 나타났다. 사냥꾼이 장작을 태우는지,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보였다. 뇌우라도 만나면 저 수상한 집에 잠시 도움을 요청해야 할텐데, 웬만하면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냥꾼은 불을 다루고 불을 자르고 불을 거느릴 것이다. 저 숲의 짐승들은 형태가 없어지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운이 나쁘면 사냥꾼의 불화살에 불이 타들어갈 것이었다. 우리 역시 짐승이었던 때가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불이 무서웠다. 우리는 사냥꾼의 집을 말 없이 지나쳤다. 벌써 먼 하늘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살아있는 불을 보려는 우리의 목적은 이처럼 소나기 속을 황급하게 걸으면서 이루어졌다. 춥고 젖은 밤 속에도 불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안에도 어두운 짐승이 산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사나 메

가슴이 답답하였다. 괜히 두어번 도나우를 건너보기도 하고,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마음이 무언가에 눌려있었는데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오후 기도 Vesper에 갔다. 기도책을 폈다. 사순절 3주차 수요일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았다:

Miserere mihi, Domine, quoniam infirmus sum: sana me, Domine.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제가 병들어 죽어가나이다: 저를 고쳐주소서, 주님. 

Conturbanta sunt omnia ossa mea: et anima mea turbata est valde. 

저는 온몸이 전부 으스러졌나이다: 또한 제 마음은 아주 어지럽나이다. 

라틴어 기도문에는 독일어에 없는 따뜻함과 절절함이 있다. 저를 고쳐주소서 “sana me(사나 메)” 는 마치 병든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부르는 것처럼 부드럽고 나약하다. 독일어 “heile mich(하일레 미히)”는 반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뻣뻣한 구석이 있다. 독어를 말하는 동안은 허리가 잘 굽혀지지 않는다. 대중과 분리된 제단쪽 공간으로,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들이 걸어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늙고 온몸이 으스러져가는 수도사들은 때로는 다리를 절면서, 때로는 텅빈 시선을 하고 겨우겨우 의자까지 도착한다. 평생 라틴어 기도문을 노래한 덕인지 제단 앞을 지날때 허리가 깊게, 유연하게 숙여진다. 높은 제단에 촛불 세 촉이 켜진다.

칸토어Cantor의 목소리가 맑다. 한 마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숨을 늦추고 공기의 떨림 속에 머무르는 것이 대단하다. 그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나는 자꾸 가슴이 아파왔다. 나으려는 모양이다. 병들고 온몸이 으스러져가는 나를 낫게 해주시려는 모양이다. 어차피 기도문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냥 가슴을 찌르는 목소리와 웅성거리는 답가를 들으면서 앉아있었다. 나쁜 피가 흘러나오듯이, 마음은 계속해서 욱신거리다가, 기도와 함께 통증도 멈추었다. 밖에 나와서 안개를 보았다. 안개 뒤에, 보이지는 않지만, 산이 있었다. 


Text für die Ausstellung: „5541km“

5541 km
Mari Iwamoto / Despo Sophocleous
13.-17. März 2019

Der Blindgänger

Die Bombe fliegt durch die Luft. Nicht nach oben wie die ersten Bomben, die nur ein schönes Feuerwerk meinten, sondern nach unten. Denn sie will Zerstörung; ihr Gesicht im Untergang ist schwarz und ernst. Dort unten ist eine Welt aus Beton und Glas, ja wohnlich und angenehm, aber auch starr und unbeweglich. Alles das soll heute ein Ende nehmen. Sie will ein neues, grünendes Leben; dazu braucht es aber zuerst Asche! So fällt sie.

Was ist passiert? Sie steckt jetzt tief im Erdreich, im Dunklen. Das Ziel hat sie nicht verfehlt, wohl aber sich selbst. Tragisch! Sie ist blind, kann sich nicht mehr zünden, nicht mehr das Chaos herbeiführen, das so bitter nötig ist. Sie schläft jetzt, um zu träumen, und träumt, um im Schlaf zu bleiben: So träumt sie von der großen Explosion.

Die Flammen gehen in allen Richtungen auf, das Licht blendet alle Augen. Alle Widerstände brechen, alles Gehemmte kommt endlich zum Fließen, durch alles strömt ein gewaltiges Leben. Doch dann wacht sie aus dem Traum auf, und fragt sich: Ist die große Explosion wirklich noch möglich? Kann ich mir noch selbst zur Gefahr werden? Sicherlich! So hängt sie, ein Fragezeichen und Ausrufezeichen zugleich, wie ein Anker, im Hinterzimmer unserer Seele.

 

„Blindgänger“ von Mari Iwamoto

 

 

Killing Time 

Wenn die schöpferische Kraft als Sinnlosigkeit erfahren wird, kann die Arbeit zum reinen Zeitvertreib werden. Ein solches Ausfüllen der Zeit tötet die Zeit, dass sie zum Stehen kommt, und die schöne Spur ihrer leeren Arbeit nun sichtbar wird.

When creative energy is experienced as meaningless, labour can become a pure pastime. Filling out time in this manner kills the time, making it stand still – so that we can witness the beautiful trace of its empty labour.

 

„Killing Time“ von Mari Iwamoto

 

Wege des Vergessens

Zu Arbeiten von Despo Sophocleous

 

Hat unsere Sprache einen Namen für etwas, das einmal war, aber jetzt nicht mehr ist? Für ein Gebäude, das jetzt z.B. nicht mehr steht? Wir sagen „das Vergangene“, und wollen schon weiterlaufen. Aber damit geben wir nur zu, dass wir nicht bereit sind, die tiefe Vergänglichkeit der Dinge zu akzeptieren. Denn während wir so reden, sprechen wir dem, das vergangen ist, wieder eine Realität zu – wir zwingen es gewaltsam, weiter zu existieren, nämlich als Vergangenes. Wie könnten wir also dem, das verschwunden ist, in seiner vollen Nichtigkeit würdigen? Wie können uns an etwas erinnern, ohne lügen zu müssen?

 

Die Aufschriften auf dem Stadtplan sind verschwunden – auch alle übrigen Informationen sind geschwärzt, übermalt, oder gar herausgeschnitten, dass nur noch skelettartige Strukturen, die aus Straßenverläufen bestehen, geblieben sind. Es sind Spuren einer Stadt, die im Bewusstsein weilte, nun aber verblichen ist; dies ist die Karte einer Stadt, die nicht mehr sie selbst ist, sondern im ewigen Transit liegt (transition). In dieser völligen Abstraktion ist sie das Sinnbild einer Erinnerung, die zugleich ein Vergessen ist. Das Gedächtnismaterial muss hier einen extremen Prozess aktiven Vergessens durchlaufen, bis das Wesentliche in die Erinnerung eingehen kann: nämlich das Vermisste.

 

Echos rufen ebenfalls nach etwas, das keinen angemessenen Namen hat – dem leeren Raum, oder architektonischen Formen, die verloren gegangen sind. Die Hohlformen fügen sich, die Logik unseres Seelenraums nachahmend, zu einer traumhaften Räumlichkeit zusammen. Auch hier ist ein Erinnerungsmechanismus am Werk, das dem Vergessen, dem Verlernen nahekommt. Das Konkrete der Wahrnehmung ist verflogen, es ist nur durch den Widerhall vorhanden. So wie man den leeren Raum auch nicht sehen, aber doch hören kann, sind diese Anhänger Echos aus einer Zeit, die einst war und nie wieder sein wird – und aus deren Vergessenheit wir stets Erinnerungen schöpfen.

 

„Echo“ von Despo Sophocleous

 

 

 

 

 

Text: Sool Park
Fotos: Mari Iwamoto / Sool Park

남는 자리, „선가귀감“ 독일어 번역

새 블로그에 처음으로 글을 쓴다.
페이스북을 매장해버리고 나서 (연락 용도 때문에 아직 완전히 매장하지는 못했다)
마음에 많은 시간이 남게 되었다. 헛생각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발화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이 있다. 세상에 뱉은 말은 유령처럼 계속 나한테 돌아오는 것 같다
뭐 그런 느낌

이렇게 워드프레스의 인터페이스로 글을 쓰고 있으면
좋아요와 댓글과 메시지를 받을 전망이 아예 없기 때문에
흥분하지 않는다. 문장 하나하나에 좋아요를 향한 장치를 탑재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왜 쓰고 있는가? 불특정 다수가 읽으라고 내 생각을 뒤집어 놓던 15년 된 습관의 그림자일까?

자리가 많다!

오늘 <선가귀감> 상권 (언해본 기준)의 초역을 끝마쳤다.
원문 번역만 놓고 보면 40% 정도를 마친듯 하고, 이제 한문/중세국어->독일어 번역이 나름 몸에 익었다.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결과 – 당연히 내 인생을 생각하면 아직 풋사과일 수밖에 없지만 – 약간 문리가 트였다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만큼은 되었다. 현토가 달려있고 문맥을 얼추 알고 있으면 대강 잘 읽는다. 내용을 잘 모르고 중국식 점만 있으면 헤맨다. 아예 모르는 글인데 백문이면, 당연히 순식간에 까막눈으로 전락.. 당연한 일이지만 한문은 아직 파악이 잘 되지 않는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다양한 사상을 투사했던 언어이기 때문에 하나의 언어체계라고 보기도 애매한 면이 있다. 반면 지난 200년 간의 독일어를 대하면, 그 크기가 정말 (상대적으로) 작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독일어 단어에 묻어있는 „어감“은 매우 구체적이라서, 10년 남짓한 독서경험으로도 거의 실수하지 않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 말인지 파악이 가능하다. 반면 한문은… 대부분 글자에 2천년씩 역사가 짊어지워져 있고, 다른 언어로 번역 되면서 헤게모니 변화가 이루어진 적이 없으며, 문어는 되었을지언정 결코 사어가 되지 않았고, 불경 번역을 제외하고는 근대 이전에 외국 개념어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의미론이 주로 재귀적 관계로 편성되어 있다. 독일 개념어는 대체로 희랍->라틴->중세독일어->독일어 이렇게 최소한 4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의미변천을 대략적으로 분절하여 추적할수가 있다. 실제로 훌륭한 학자들은 저 4단계 (가끔 히브리어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개념의 근원을 추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한문은 이 글자가 몇살 때(?)의 의미로 쓴 건지 알 수 있는 텍스트 내적인 징표가 하나도 없다. 결국 주해에 의지해야하고, 주해를 단 사람에 의지해야하며, 전통에 의지해야 한다. 장점이자 또 단점이겠다.

지금까지 <선가귀감> 번역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다.
1) 개념어 번역에서는 현대적 용어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한다.
2) 문체는 „고풍스럽고“ „선불교답게“ 한다.
3) 주석을 아끼지 않는다.

1)은 독일어->한국어 번역에서는 불가능하다시피한 일인데, 반대쪽으로는 이외의 방식을 처음부터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 신기하다. 예컨대 매우 학술적이고 명료한 „미국식“ 번역을 해볼 생각은 추호도 해보지 않았다. (미국어 싫다, 영어 말고)

한국어에는 메이지 번역어라는 거대한 장벽(이자 도구)이 있어서 창조적인 번역어를 만들어낼 여지가 희박하고, 언문(!)으로 철학을 했던 전통이 일천하여 1)을 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렇게 하려면 비트겐슈타인 <논고>의 Bild를 „얼굴“ (중세국어에서는 형상 일반을 나타내는 말)로, abbilden은 „얼굴 잡다“ 이런 식으로 해야할텐데, 아무래도 무리다. 얼마 전에 류영모/함석헌이 순우리말로 옮긴 <노자>를 보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제목부터 <늙은이> …..) 내가 모르는 19세기 한국어의 깊이를 가지고 어떤 것을 끌어낼 수 있었으리라 짐작은 해보지만, 일단 21세기의 독자인 내가 얻을 수 있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어는 2-3세기 전부터 라틴어 개념어를 거의 전부 독일어화시켜서 쓰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조작이 용이하다. 언어에 틀이 잡혀있다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철학소’로 분절이 되어 있어서 새로운 개념어를 조립하기에 좋다.  레고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문제는 원래 있는 블록으로 만들 수 없는 모양이 등장할때 발생하는 법이지만.. 반면 (한문을 버린) 한국어는 기틀이 없다. 일종의 진흙이다. 이것은 번역을 할 수 있는 재료는 될 수 없지만, 일종의 환경Umwelt를 형성해준다. 아직까지는 매우 변방에 위치하고 있지만, 중국/미국 중심체제에 대한 높은 유착으로 중심언어들과 매우 높은 연동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가 번역 대상이 된 역사는 매우 짧아서, 의미 분절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독일어의 문법구조는 매우 명료하게 해체되어 있지만 한국어의 문법구조는 한국인도 모른다. 또한 사전도 안 좋고, 어족도 동떨어져 있는데다가 어원이 잘 연구되지도 않아서 아주 중심적인 단어들도 도저히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진정한 모국어, 이상적인 메타언어인 것이다.. (조금은 반어적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경우도 많다)

이야기가 샜는데 아무튼 중요한 점은 독일어의 조작성이 높아서,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최대한 용어를 직접 주조해보려는 욕심을 실현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독일어로 번역된 불교서적을 읽으면 끔찍한 원어주의자들이 산스크리트어 용어로 책을 도배해둬서, 한줄에 한번은 발음조차 하지 못하겠는 것들이 튀어나온다. 그렇게 번역을 해두면 학문체계 내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정확성“은 얻을 수 있지만 번역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줄여버리는 꼴이 된다. 도착어를 창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 그리고 이 의미에서 변화는 „개혁“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 내재한 뒷길, 말하자면 언어 이전으로 돌아가는 길을 개척하는 일이다.

개념발생의 순간, 즉 언어가 탄생하는 순간에 언어는 언어 아닌 것과 접촉하게 된다. 이것은 규범적 언어사용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것)과는 다르다. 창조적 순간에 언어는 갑자기 가상적인 것, 변용가능한 것, 가장 가벼운 동시에 무거운 것으로 경험된다. 언어에는 구조와 물성이 있고, 일종의 마찰과 반동력이 내재하여, 언어가 아닌 것이 그것에 닿을때 완벽하게 자유로운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결을 따라서 형성되게 해준다. 언어가 아닌 것의 비율이 낮거나 미약하다면, 언어 자체가 가진 관성에 의거해서 발화가 이루어진다. 심한 경우 오히려 언어가 역류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내면 세계가 외부 언어의 구조에 의해서 경화된다. 도저히 생동감이라고는 없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의 경우, 발화의 뿌리가 자라나기 전에 이미 언어에 침식되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언어 밖에서 경험되는 것이 언어 안으로 쳐들어올때는 다르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두가지 극단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한가지는 수세에 몰린 정신이 하나의 점에 힘을 집중하여 언어의 밀도보다 높은 관통력을 발휘할 때이다. 흔히 말하는 문학은 이 방식에 가깝다. 다른 하나는 언어 자체의 가상성이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충만의 상태에서 흘러넘치는 말하기이다. 이것은 계시적 언어이다. 두 극단은 묘한 방식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려움은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온다. 가장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개념들을 번역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음心“ „법法“ „수행修行“ 같은 것이 정말로 어렵다. 사용되는 범위가 넓어서 잘 상응하는 독일어 단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내가 실제로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의 뜻은 알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말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그 반대편을 알아야 한다 (무엇에 대비해서? im Gegensatz wozu?). 루만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구분의 일부로 이 의미가 움직이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대척점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마음에는 „외부“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에게 가장 가까운 것에 대비시켜서 분화한다면 „몸“이 있겠다. 마음에게 몸은 특별한 장소이지만, 또 ㅏ 다르고 ㅗ 다른 정도로밖에는 다르지 않다. 히브리어를 배웠던 경험을 적용하여 모음을 없애보면, 맘과 몸은 둘다 m’m으로, 결국 뿌리(Radikal)가 같은 단어로 보인다.. 철학적으로는 마음의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어서 개념화가 가능한데, 이것이 능소能所의 구분이다. 보는 자, 그리고 보는 바 사이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서양 근대 철학의 주관-객관의 구분과는 다른데, 객관이 „마음 외부의 것“이라는 생각불가능한 것을 존재론적으로 상정하는 한편, 마음에 대한 분화는 다시 마음 안에서 그 대립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립의 사라짐을 깨달음(진리)라고 놓으면, 이 체계 전체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 수 있다. 개념분화의 차이, 그 이유를 조금 더 따져보자면 종교적 체험의 위치가 고대 그리스처럼 인간의 외부(자연력)이었는지,  인도-중국처럼 인간의 내면이었는지에 따라서 개념체계가 형성되는 경향이 달랐던 것도 같지만, 여기까지 가면 추측일 뿐이다.

마음은 모든 것을 담는 것이지만 또 그 안에 담긴 각각의 것이 서로 구분되게 하는 원인이다. 마음 속에 없는 것은 없지만, 마음과 같은 물건은 없다. 이것은 신학으로 보자면 신에 해당하는 위치다. 그렇다면 마음을 신Gott 으로 번역해야 하나? 예수회가 처음으로 중국에서 선교를 펼치면서 한문 문헌을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할때, 도道를 신으로 번역했던 것과 같이, 이것은 이해인 동시에 오해가 될 것이다.

마음의 번역어에 대해 물었더니 한문을 가르치는 독일 교수는 그냥 어원을 멍청할 정도로 따라서 Herz(심장)으로 해야 한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한문 텍스트의 경우에는 정당한 일이다. 언해문에서는 항상 „마음“으로 옮기는데, 그 의미는 물론 신체기관 „심장“이 아니다. Herz 역시 독일어에서 „마음“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예컨대 „그는 마음이 넓다“라고 말하려면 „그는 큰 심장을 가졌다Er hat ein großes Herz“라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마음이 아프다“를 „Mir tut das Herz weh“라고 말하면 병원을 알아봐줄 것이다. „마음“은 실제로 „신“에 해당하는 개념적 „크기“를 가지고 있다. „신“이 차지하는 개념적 위치는 근대화를 거친 이후의 서양 언어에서는 좋게 말하면 유보되어 있고 나쁘게 말하면 손상되어 있어서 여기에 넣을 수는 없다. „부처“같은 말을 „신“의 위치에 넣으면 감성적인 저항이 온다 (신성모독이 아니라 정확히 반대의 감각, 즉 신을 되살리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수행“같은 개념도 번역이 매우 까다롭다. 수행은 개별자가 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하는 비개념적 작업이다. 이는 예컨대 „명상Meditation“이 아니다. 나는 처음에는 Einüben을 쓰고 있었는데,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책 제목인 „Einübung ins Christentum“에서 따온 것이다. 연습Üben을 통해서 안으로ins 들어ein-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수행 개념과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역시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점 („도를 닦다“도 목적어가 있지만 도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외적 존재자가 아니다)이 거추장스럽고 맞지 않는 것 같다. 관음선 계열에서는 practice, praktizieren를 사용하는데, 숭산 스님이 수행을 이렇게 번역했던 것 같다. Theorie-Praxis 에서 오는 좋은 대립구도도 있다. 그러나 praktizieren은 어감이 너무 인공적이라는 극단적인 단점이 있다. 16세기에 절대로 썼을 단어가 아닌 것이다. 한문 교수는 pflegen(가꾸다, 돌보다, 고치다)가 좋다고 했다. pflegen은 핵심 의미는 원래 상태를 잘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은 원래 상태를 완벽하게 뒤바꾸거나, 시작 상태를 파괴해버릴 수도 있다. <육조단경>에 나오는 신수-혜능의 게송 배틀은 바로 수행이 pflegen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며칠 전부터 사용하게 된 단어는 läutern, Läuterung(정화, 제련하다)이다. lauter는 예전에 hell 과 같은 의미, 즉 „맑다, 밝다“였다. 탁한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과정이고, 종교적 문맥에서도 사용된 예시가 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반쪼가리 문장은 서문에 나오는 „…dass es sich zum Geist läutere“ (그리하여 정신을 향해 정화될 수 있도록)이다.

아무튼 이런 고민은 끝이 없지만, 개념을 정말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번역 작업은 큰 특권이다. 사실 번역을 하지 않고서 개념을 제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을 정도다. 언어 전체와 개념어 사이의 관계 („개념의 좌표“)가 드러날 때가지 헤매야, 다른 언어 내에서 비슷한 위치를 찾을 수가 있다. 어원적 접근은 좁은 „지금“의 언어에서 벗어나서, 말하자면 시선을 들어올려서 언어의 풍광을 보게 해주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

(문체의 번역에 대한 것은 다음번에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선가귀감 <상권>을 끝마치자, 마지막 목판에 새겨져있는 시주자의 명단이 나왔다.
시주를 많이 한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모양인지 위쪽에 새겨져 있고, 이름도 박운희, 구희복 처럼 정상적인 한문 이름들이다. 아래로 내려오면 가난한 불자들이 없는 살림에 시주를 한것이 느껴지는데, 이름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을 몇개 적어본다.

이팔년. 한두리동. 돌덕. 덕개. 조어리동. 막세. 개이. 최끝동. 춘배. 문이.

성도 가져보지 못한 무지렁이 돌덕, 덕개, 춘배가 몇푼씩 모아준 돈으로 이 목판이 새겨졌고 그 결과물을 오늘 내가 독일에서 보고 있다는 것은 특별하다. 그들은 이 목판이 담은 말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무리 언해문이라고 해도 한문이 절반이니 말이다. 나아가 그들은 이런 법문이 필요없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상처입은 현대인의 비밀스러운 취미, 낭만주의만은 아니다. 나무꾼 혜능이 <금강경> 독송을 한마디 듣고 깨쳤을 때는 글 한자 모르는 까막눈이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장 가치있는 것들이 전문가가 아니라 그 외부에 있는 다른 힘을 통해 유지된다고 느낄때가 많다. 그것이 철학, 종교, 예술 중의 어떤 것이든간에, „바보“들이 그것을 떠나면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면 썩어들어간다. (엘리트가 없어도 작동하지 않겠지만) 내가 본 최고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시골이나 변방에서 자란 튼튼하고 억센 사람들이었다. 변방, 부드러운 모름, 별 생각없는 웃음을 생각한다. 변방에서, 계급도 직업도 없는 곳에서, 임시로 지은 집에서 모닥불에 토란을 구워먹으면서, 모두들 서로 만난다. „거울을 깨뜨리고 서로 만난다“라고 선에서 말하듯이 그렇게.

 

 

 

 

 

 

그리스 여행기 #1

새벽에 뮌헨 공항을 떠나, 이스탄불을 경유해서 아테네의 숙소에 도착하자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서울에서 오신 아버지는 에어비엔비에 몇시간 전에 이미 도착해서, 아카시아 나무가 드리운 발코니에서 브루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을 읽고 계셨다.

 

나는 그리스의 공기를 처음으로 마시고, 햇빛을 처음으로 쬐었다. 아무런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남의 집에 앉아 있었지만 내 집처럼 편안했다. 위험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 자체가 무언가로 가득 차있는 듯 했다.
느긋하고, 따뜻하고, 생명으로 넘쳐 흐르는 공기다.
다급한 마음,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마음, 뭔가 쌓아올리거나, 저장하거나, 축적해야 한다는 마음이 없다.
빨리 움직일 필요도 없을 뿐더러, 빨리 움직일 수도 없다.
반대로 마음의 작용은 한결 자유롭다.
여기에 겨울 따위는 오지 않는다는 생각,
나아가 내 마음 속에 단 한번의 겨울도 없었다는 환상이자 희망이, 곧 사실이 되어서 다가온다.
현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 나아가 부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내가 그 위에 떠있을 수 있는 튼튼한 공기와도 같다.
그런 공기가 여기에는 있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얻는다.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발버둥을 치면서 수면 위에 떠있고자 고생을 했는가, 그런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독일에서, 얼마나 열심히 살면서 사람과 물건을 통제하려고 애썼는가..
베란다의 아카시아 나무에 온갖 벌들이 날아와서 꿀을 마신다.
그렇게 나도 아테네의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꽃처럼, 아테네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뙤약볕을 뚫고 아버지와 아크로폴리스에 올랐다.

 

아크로폴리스는 겸손함이라고는 없는 그리스인들의 강대함을 건축으로 바꾸어놓은 듯했다.

아테네 시내 전체를 우월감에 차서 내려다볼 수 있는 막강한 암벽 위에 지어진 이곳은, 신들로 하여금 지상에 살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들 또한 신들과 더불어 살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인간은 하늘을 향해 신전들을 밀어올리고, 신들은 인간의 희생제물의 연기를 들이마시기 위하여 지상으로 강림한다.

나는 아크로폴리스는 인간과 신이 만나는 장소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종교는 단순히 천지의 접촉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늘에 굴복하거나 거기에 맹목적으로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 오히려 아크로폴리스에서 인간은 신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선다. 신들의 우월함 속에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의 젊음과 우월함을 투영하였다.

횔덜린의 비가 <빵과 포도주>의 구절이 생각났다. 되는대로 아버지에게 즉석에서 번역해드렸다. 횔덜린이 말한 것처럼, 여기에서 보니 바다가 바닥을 이루고, 산맥들이 탁자에 불과한 거대한 연회장에 들어온 듯 하다고. 아크로폴리스를 그리스인들은 자신을 상승시킴으로써 세계를 보는 광학을 바꾼것 같았다.

나중에 집에 와서 해당구절을 번역해보았다. <빵과 포도주>의 4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복한 그리스여! 너 뭇 천신들의 집이여,

그러니 우리 어린시절에 들었던 이야기가 진실이란 말인가?

축연의 장이여! 바다가 바닥을 이루는구나! 산맥은 탁자로구나!

진실로 단 하나의 의례를 위해 예전에 지어진 것이니!

그러나 왕좌들은 어디에 있는가? 신전들은, 넥타르로 채워진

술통들은 어디에, 신들의 쾌락을 위한 노래는 어디에 있는가?

아크로폴리스 위에 올라서 있으면, 스스로가 한명 거대한 신이 된 것과 같은 환상에 빠진다. 저 아래편의 인간세계는 먼지처럼 의미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린다. 내가 서 있는 „천신들의 집“은 대리석의 순수한 하얀색으로 빛나며, 그 위로는 구름 한점 없는 푸르름이 펼쳐져 있다. 일상의 번잡한 세계, 즉 고통의 세계는, 신계라는 환상을 이룩함으로써 자취없이 가려져버린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아폴론적 예술“은 필멸의 고통을 은폐하는 가상의 예술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 건축은 햇빛에 관한 것이다. (아폴론은 빛과 조형의 신이다!)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신전 건축을 보면 대체로 인위적으로 깊은 어두움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반면 그리스 건축은 모든것이 야외의 훤한 빛 속에서 이루어진다. 빛은 구태여 연출하지 않더라도 어디에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의 당당함은 그 자연적인 풍성함으로부터 오며, 풍성함을 마음껏 낭비하는 거침없는 정신에서 오는듯 했다. 이곳의 자연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저녁에 아버지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타베르나Taverna)을 찾았다.

동네 사람들이 무슨 행사를 하는지 몇십명씩 한 테이블에 앉아서 구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끄러웠다. 여름밤의 공기가 따뜻하게 피부에 와 닿았고, 태어난지 한달쯤 된 새끼 고양이들이 겁도 없이 다가와서 우리를 올려다보면서 울었다.

빵과 포도주가 나왔다.

빵은 평범하고 말이 없어서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빵이라는게 원래 소박하여 이런가보다. 포도주 역시 프랑스처럼 거창한 „아뻴라시옹“ 에티켓이 병에 담겨 있지도, 유약한 크리스탈 잔에 우아하게 담겨 나오지도 않았다. 격식이 시끄럽지 않고 순해서 좋았다. 붉은 포도주는 그냥 막 나무통에서 따라서 구리로 된 투박한 병에 담겨서 나왔고, 잔은 물잔보다도 더 보잘것 없는 짜리뭉툭한 잔이었다. 쓸데없이 향을 끌어낸다는 이유로 실온에 두지 않고, 그냥 솔직하게 차갑게 식혀서 나왔다. 집에서도 이렇게 와인을 편하게 대해본 적이 없었다. 그 맛은 놀라울 정도로 달콤하고 청량했다. 우리는 구리병을 두번 더 채우면서, 밤이 될 때까지 마셨다. 양갈비를 먹고, 전채를 4가지나 먹었는데도 전부 합해서 40유로밖에 나오지 않았다. 독일의 반값, 서울로 치면 1/3 정도 되는 가격이 아닐까. 아버지와 나는 그리스가 좋았다. 내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정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리스에서는 어려운 일들, 불가능한 일들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 놀라운 마음을 간직한채 잠들었다.

 


 

빵과 포도주

프리드리히 횔덜린

4

지복한 그리스여! 너 뭇 천신들의 집이여,
그러니 우리 어린시절에 들었던 이야기가 진실이란 말인가?
축연의 장이여! 바다가 바닥을 이루는구나! 산맥은 탁자로구나!
진실로 단 하나의 의례를 위해 예전에 지어진 것이니!
그러나 왕좌들은 어디에 있는가? 신전들은, 넥타르로 채워진
술통들은 어디에, 신들의 쾌락을 위한 노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 어디에서 빛나는가, 멀리에서 날아와 적중하는 신탁들은?
델피가 잠들어 있으니, 거대한 운명은 어디에서 울리고 있는가?
번개 같은 운명은 어디에 있는가? 온 사방 지복으로 가득찬 그것은
어디로부터, 맑은 공기를 뚫고서 눈앞에 나타나는가?
아버지 에테르시여! 운명은 그렇게 부르짖으며 혀에서 혀로
수천갈래로 비행했으니, 삶은 그 누구도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것;
그처럼 값진 것을 서로 나누면 기쁘니, 낯선 이들과 바꾸면서,
하나의 환성이 되고, 말의 권력은 잠든 사이에 자라나
아버지! 밝습니다! 멀리까지 울려퍼지니, 태초의 징표,
선조에게 물려받은 그것은 적중시키고 또 창조하며 아래로 뻗어나가는구나.
이렇듯 천신들은 자리를 찾아 머물고, 이렇듯 깊은 전율을 전하면서
그림자로부터 나타난 대낮은 지상의 인간들에게 와닿는도다.

Seliges Griechenland! du Haus der Himmlischen alle,
Also ist wahr, was einst wir in der Jugend gehört?
Festlicher Saal! der Boden ist Meer! und Tische die Berge
Wahrlich zu einzigem Brauche vor Alters gebaut!
Aber die Thronen, wo? die Tempel, und wo die Gefäße,
Wo mit Nektar gefüllt, Göttern zu Lust der Gesang?
Wo, wo leuchten sie denn, die fernhintreffenden Sprüche?
Delphi schlummert und wo tönet das große Geschick?
Wo ist das schnelle? wo brichts, allgegenwärtigen Glücks voll
Donnernd aus heiterer Luft über die Augen herein?
Vater Äther! so riefs und flog von Zunge zu Zunge
Tausendfach, es ertrug keiner das Leben allein;
Ausgeteilet erfreut solch Gut und getauschet, mit Fremden,
Wirds ein Jubel, es wächst schlafend des Wortes Gewalt
Vater! heiter! und hallt, so weit es gehet, das uralt
Zeichen, von Eltern geerbt, treffend und schaffend hinab.
Denn so kehren die Himmlischen ein, tiefschütternd gelangt so
Aus den Schatten herab unter die Menschen ihr Tag.

#

멍청해지면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해지면서, 나는 나약함을 참았다. 공기가 무거워지고 중력이 무거워지는 느낌. 개방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이 내 안에서, 그 오래된 문을 열어젖히려는 나에게 대항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숨을 내쉰 이후로 나는 그것에 몸을 내어주었고, 첫 번째 굳은 음식을 먹은 이후로 그것에 마음을 내어 주었다. 나의 거의 모든 부분은 그것이 가져갔다. 그것이 만지는 부분마다 한낱 부분이 되었고, 영역과 구역으로 분할되었고, 망쳐졌다. 망쳐진 나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꽃을 피웠다. 웃음과 눈물과 악수와 포옹과 입김과 바람을 안겨주었다. 꽃을. 문 밖에 쫓겨난 채로 몇 년을 바람에 쓸려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 수백번도 더 건넌 본관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갑자기 알 수 있었다. 그것에게 내 모든 걸 다 내어주면, 다 얻을 수가 있다. 나는 멍청하게,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고 머리가 터져나갈 것처럼 멍청하게, 횡단보도 위에 멈추어 섰다. 차들이 나를 향해서, 나로부터,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서로를 깔아뭉개면서 어지럽던 소음들이 한 순간에 모두 멈추었다. 더 이상 나약함은 나를 참지 않았던 것이다. 꽃이 없었고, 그래서 거리가 별안간 만발했던 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 전체에는 단 한그루의 자목련이 있었다. 예전에 어떤 귀족이 살았던 집 뜰에, 예전에 강대하고 사치스럽고 멍청하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타고 집을 떠나버리기 전에 심은 것이었다. 열 번의 봄이 오고 다시 가는 동안, 나는 저택의 자목련의 봉우리가 열 번 열리고 맺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변화를 이해해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아무래도 멍청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해를 했다고 말한다면, 자목련을 제대로 지켜보지 않은 사람이다. 내 안에서 열 번의 자목련이 개화하고, 쇄국하고, 폐하고, 쇠하고, 靈하고, 昭하고, 그러나 다시 迷하고, 또 盲하는 동안, 나는 그것을 지켜볼 용기가 없었다. 나는 매만지고 있었으며, 까탈스럽고 있었으며, 쓰다듬고 있었으며, 맞추어보고 있었으며, 떼어놓고 있었으며, 덮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축일을 맞이한 듯이…

횔덜린의 유작 „마치 축일을 맞이한 듯이…“ 번역을 손보고, 독일어 텍스트를 녹음해보았다.

 

 

Wie wenn am Feiertage …

Friedrich Hölderlin

Wie wenn am Feiertage, das Feld zu sehn,
Ein Landmann geht, des Morgens, wenn
Aus heißer Nacht die kühlenden Blitze fielen
Die ganze Zeit und fern noch tönet der Donner,
In sein Gestade wieder tritt der Strom,
Und frisch der Boden grünt
Und von des Himmels erfreuendem Regen
Der Weinstock trauft und glänzend
In stiller Sonne stehn die Bäume des Haines:

So stehn sie unter günstiger Witterung,
Sie die kein Meister allein, die wunderbar
Allgegenwärtig erzieht in leichtem Umfangen
Die mächtige, die göttlichschöne Natur.
Drum wenn zu schlafen sie scheint zu Zeiten des Jahrs
Am Himmel oder unter den Pflanzen oder den Völkern
So trauert der Dichter Angesicht auch,
Sie scheinen allein zu sein, doch ahnen sie immer.
Denn ahnend ruhet sie selbst auch.

Jetzt aber tagts! Ich harrt und sah es kommen,
Und was ich sah, das Heilige sei mein Wort.
Denn sie, sie selbst, die älter denn die Zeiten
Und über die Götter des Abends und Orients ist,
Die Natur ist jetzt mit Waffenklang erwacht,
Und hoch vom Äther bis zum Abgrund nieder
Nach festem Gesetze, wie einst, aus heiligem Chaos gezeugt,
Fühlt neu die Begeisterung sich,
Die Allerschaffende, wieder.

Und wie im Aug‘ ein Feuer dem Manne glänzt,
Wenn hohes er entwarf; so ist
Von neuem an den Zeichen, den Taten der Welt jetzt
Ein Feuer angezündet in Seelen der Dichter.
Und was zuvor geschah, doch kaum gefühlt,
Ist offenbar erst jetzt,
Und die uns lächelnd den Acker gebauet,
In Knechtsgestalt, sie sind erkannt,
Die Allebendigen, die Kräfte der Götter.

Erfrägst du sie? im Liede wehet ihr Geist
Wenn es der Sonne des Tags und warmer Erd
Entwächst, und Wettern, die in der Luft, und andern
Die vorbereiteter in Tiefen der Zeit,
Und deutungsvoller, und vernehmlicher uns
Hinwandeln zwischen Himmel und Erd und unter den Völkern
Des gemeinsamen Geistes Gedanken sind,
Still endend in der Seele des Dichters,

Daß schnellbetroffen sie, Unendlichem
Bekannt seit langer Zeit, von Erinnerung
Erbebt, und ihr, von heilgem Strahl entzündet,
Die Frucht in Liebe geboren, der Götter und Menschen Werk
Der Gesang, damit er beiden zeuge, glückt.
So fiel, wie Dichter sagen, da sie sichtbar
Den Gott zu sehen begehrte, sein Blitz auf Semeles Haus
Und die göttlichgetroffne gebar,
Die Frucht des Gewitters, den heiligen Bacchus.

Und daher trinken himmlisches Feuer jetzt
Die Erdensöhne ohne Gefahr.
Doch uns gebührt es, unter Gottes Gewittern,
Ihr Dichter! mit entblößtem Haupte zu stehen,
Des Vaters Strahl, ihn selbst, mit eigner Hand
Zu fassen und dem Volk ins Lied
Gehüllt die himmlische Gabe zu reichen.
Denn sind nur reinen Herzens,
Wie Kinder, wir, sind schuldlos unsere Hände,

Des Vaters Strahl, der reine, versengt es nicht
Und tieferschüttert, die Leiden des Stärkeren
Mitleidend, bleibt in den hochherstürzenden Stürmen
Des Gottes, wenn er nahet, das Herz doch fest.
Doch weh mir, wenn von

Weh mir!

Und sag ich gleich,

Ich sei genaht, die Himmlischen zu schauen,
Sie selbst, sie werfen mich tief unter die Lebenden,
Den falschen Priester, ins Dunkel, daß ich
Das warnende Lied den Gelehrigen singe,
Dort

 

 

마치 축일을 맞이한듯이…

마치 축일을 맞이한듯이, 밭을 보려는 마음에,

아침녘에, 땅을 일구는 그가 집을 나서듯,

뜨거운 밤의 안에서 시원한 번개들이 떨어진 후

멈출줄 모르고 아직도 저 멀리 우레가 울릴 때,

농부의 도랑에 다시 물길이 굽이쳐 들고,

땅이 싱그럽게 초록으로 물들때

기쁨을 주는 하늘의 빗줄기로ᅠ

포도넝쿨에 물이 방울져 빛날때ᅠ

숲의 나무들이 조용한 햇빛 아래 서있을 때처럼:

 

그렇게 그들은 좋은 바람을 얻은 채로 서있네,

어떤 스승도 혼자서 그들을 가르치지는 못하니,

기적같이, 어디에서나 곁을 가벼이 감싸는

강대하고, 신처럼 아름다운 자연만이 그들을 길러내네.

그렇기에 한해의 절기에 따라 잠든듯 보일지라도

하늘을 향해, 초목과 민중 가운데에서ᅠ

그들 시인들의 얼굴은 슬픔에 잠긴 것이니,

혼자인듯 싶어도, 오히려 예감을 멈추지 않는 것은

자연은 예감하면서 스스로도 쉬고 있기 때문이네.

 

하지만 이제는 대낮이로다! 버틴 끝에 나 다가옴을 보았으니,

나는 보았네, 신성한 것이 내 말이 되리라고.

다름 아닌 그녀가, 뭇 시간들 보다도 오래된 그녀

서방과 동방의 신들 보다도 높은 곳에 있는 그녀가,

바로 그녀 자연이 이제 칼날을 부딪히며 깨어났으니,

위로는 에테르부터 아래로는 심연에 이르기까지ᅠ

굳건한 법칙을 따라, 태초에 그랬듯, 신성한 혼돈에서 태어난 채로,

새롭게 몸을 뒤흔드는 신들림을,

만물을 세우는 그녀는, 다시금 느끼네.

 

남자의 눈 속에서 불꽃이 번쩍이듯이,

그가 높은 것을 그릴때 그러하듯이; 그처럼ᅠ

다시 한번 세계의 징표들, 행위들을 보고 이제ᅠ

시인들의 영혼 속에서는 불길이 일어나네.

예전에 벌어졌던 일, 그러나 아무도 느낀적 없던 일이,

이제서야 훤히 드러나네,

웃으면서 우리의 밭을 일궈주던 이들,

하인의 가면을 썼던, 그들의 정체가 이제 밝혀졌으니

만물을 감싸는 생명, 신들의 권능들이어라.

 

너 그들에게 물으려는가? 노래 속에 그들의 정신이 나부낀다

노래는 낮의 태양과 따뜻한 대지를 의지하여

자라나고, 여러 날씨에 의지하여, 공기 안에서,

또 더 무르익은 노래들은 시간의 심연 속에서,

점괘로 가득찬 채로, 우리가 지득하기 쉽도록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면서, 민중 가운데 머무르니,ᅠ

이는 공통의 정신이 떠올린 사상들,

끝내 시인의 영혼으로 가만히 흘러드노라,

 

빠르게 적중된 시인의 영혼은, 예로부터ᅠ

무한을 익히 알고 있는 것, 기억으로

떨리는 영혼, 그 안에서, 신성한 빛의 줄기로 불붙어,

사랑이 맺은 열매가 태어나니, 바로 신들과 인간의 작품인

노래가, 둘 모두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완성되는 것.

이처럼, 시인들이 전해주듯이, 두 눈으로ᅠ

신을 보고자 욕망했던 자,  세멜레의 집에는 신의 벼락이 내려

신에게 적중된 그녀는 그리하여,

폭풍이 맺은 열매, 신성한 바쿠스를 낳았던 것.

 

그리하여 이제 천상의 불길을ᅠ

대지의 아들들은 위험 없이 들이키노라.

그렇지만 바로 우리의 운명이로다, 신의 폭풍우 아래에

너희 시인들이여! 헐벗은 머리로 우두커니 서서,

아버지가 내리는 빛의 줄기, 그 자체를, 우리 손으로

움켜쥐어, 민중을 향한 노래 안에

감추어 천상의 은총을 넘켜주는 일이.

순수한 심장을 가졌을 뿐,

아이들 같을 뿐, 우리의 손은 무고하네,

 

아버지의 광선, 그 순수한 빛은 우리 심장을 그슬리지 않네ᅠ

그리고 깊은 전율로 말미암아, 강자의 고통을ᅠ

함께 아파하니, 높은 곳에서 우르르 내리는 폭풍 속에서

신이 다가올 때, 그 폭풍 속에서도, 우리 심장은 굳세네.

하지만 내 재앙이로다, 만일

 

내 재앙이로다!

 

내 이렇게 말한다면,

천상의 자들을 보려고 가까이 갔다 말한다면,

그들이 직접, 나를 산 자들 가운데로 던져 넣으리니,

가짜 신관을, 어둠 속으로 던져 넣으리니, 그리하여 내가

학자들에게 경고의 노래를 부르게 하기 위하여,

그곳에서ᅠ

횔덜린의 귀향 Heimkunft

횔덜린의 시 귀향(Heimkunft)을 본다. 시작은 이렇다.
 
알프스 깊은 곳은 아직도 밤으로 빛나고
희열을 노래하는 구름은, 깊게 벌어진 골짜기를 덮는구나
Drin in den Alpen ists noch helle Nacht und die Wolke,
Freudiges dichtend, sie deckt drinnen das gähnende Tal.
 
첫 행만 읽어도 이것은 디오니소스적 혼돈과 아폴론적 꿈에 관한 시다. gähnen을 여기서 일상어 용법의 „하품“으로 읽으면 안된다. 쩍 벌어진 괴물의 아가리처럼 바닥을 알 수 없고 어두운 장소가 바로 골짜기Tal이다. 내가 유년을 보낸 곳도 흑림의 한 골짜기인데, 산이 험한 곳에서는 당연히 모든 마을이 골짜기에 형성된다. 물론 그 곳이 살기 좋아서 일어난 일은 아니다. 단지 정상에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일의 기후에서 골짜기는 항상 비가 내리고, 해가 짧고, 축축한 곳이다. 우리가 삶을 시작하는 장소는 이렇게 적대적이고 우중충하지만, 가끔 산정에 오르면 골짜기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띄운 구름은 일상의 모든 구질구질함을 슬쩍 가리워버리고, 이제 머리 위로는 밤이 빛난다. 왜 낮이 아닌 밤이 빛나는가? 여기서는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너무 강렬한 태양빛을 보고 나면 치유를 위해 시야에 어두운 반점이 나타나듯이, 너무 강렬한 어둠을 보고나서 치유의 목적으로 나타난 것이 빛나는 도리스 예술“(정확한 인용은 아님..) 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밤은 빛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빛을 그리워할 수 있는 곳이고, 그리움의 심상은 곧 노래이며, 노래는 어둠을 가리운다…
서서히 걸음과 싸움을 시작하는, 희열로 전율하는 혼돈이여,
그 모습은 젊으나, 오히려 강인하여, 축전에서 에로스의 경쟁을 벌이고
암벽 아래서, 영원한 제약 속에서 들끓고 흔들리고 있으니,
바쿠스와 같은 아침이 그 안에서 솟아오르고 있음이다.
Langsam eilt und kämpft das freudigschauernde Chaos,
Jung an Gestalt, doch stark, feiert es liebenden Streit
Unter den Felsen, es gärt und wankt in den ewigen Schranken,
Denn bacchantischer zieht drinnen der Morgen herauf.
혼돈은 원래 장자에 나오는 말인데, 우연히도(!) Chaos와 너무 잘 맞는 번역어이다. 장자의 „혼돈“은 얼굴에 구멍이 없어,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웃 제후들이 하루에 하나씩 얼굴에 구멍을 뚫어주었더니 7일째 되는날 죽어버리고 말았다. 혼돈은 정제되지 않은 자연의 힘이며, 모든 제약과 소위 „문명“의 사슬들을 다시 끊어버릴 수 있는 힘이다. 암벽과 같은 사회와 문화의 속박이 생명을 옥죄어오고 있지만, 아침처럼 어쩔 수 없이, 가차 없이, 혼돈은 다시 솟아오른다. 2행에서 liebend를 „사랑어린“으로 번역하면 „사랑“이란 말이 현대어에서 가진 어감 탓에 망쳐버리는데, 다른 말을 찾지 못하여 아예 노골적으로 플라톤적 단어인 „에로스“를 사용해 보았다. 이 부분은 유명한 그리스빠(!)였던 횔덜린이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독일로 수입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에로스라는 말이 그렇게 빗나가지도 않는 듯 하다. 힘의 과도함, 경쟁과 싸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젊음, 이것을 부드러운 말인 „사랑“에 붙이기는 어렵다. 자신 아닌 것을 향해 쏟아지듯이 집중하는 힘인 „에로스“가 낫지 싶다.
알프스의 산들을 – 아래에서든 위에서든 – 바라보면 한국의 산들과는 그 안에 흐르는 에너지가 다르다. 한국의 자연은 지질학적으로도 „늙은“, 오랜 풍화를 통해 부드럽게 갈려나간 산들이라면, 알프스의 산은 지금도 융기하고 있는 „젊은“ 산이다. 이 산들은 강인하고, 아직 부러지지 않아 예리하고, 험준하고, 자비를 모르고, 낭비적으로 아름답다. 바쿠스는 이런 산들에서 태어난다. 그리스의 지중해를 잘 모르지만, 산이 물 아닌 방식으로, 역설적으로 닮아 있지 않을까? 아무튼 독일인은 자신의 축축한 숲과 험준한 산맥을 바탕으로, 그리스의 강렬한 햇살과, „포도주빛 바다“를 번역해낸 것이라고 하겠다. 기후와 자연은 민족의 사유와 감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가 부르는 노래, 먹는 음식, 뒷목에서 허리에 이르는 자세, 우리가 믿는 신은 – 얼마나 지금 서 있는 땅에서 나온 것인가? 
독일 문화를 이해하는데 내게 약간의 장점이랄만한게 있다면, 그것은 분명 언어실력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보다 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은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4년 동안 흑림에서 살았던 것은, 그 전에 15년 동안 아스팔트 위에서 살았던 시간과 대비해서, 엄청난 영향을 가져왔다. 나는 가차없이 얼굴을 바꾸는 날씨와 온도를 사랑할 줄 알게 되었고, 모든 인공물을 조금 싫어하게 되었다. 독일적 „무거움“을 알고 – 예컨대 검은빵과 버터의 맛 – 그와 쌍으로 태어난 개념인 „남국적 가벼움“ – 예컨대 흰빵과 올리브유 -를 이해했다. 그런 도식 안에 자신을 넣게 되었다는 뜻이다. 음식의 맛으로 균형을 잡는 작업은 니체가 <이사람을 보라>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본래 철학에 속하는 일이다. 공자나 부처도 음식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마지막 부분이 음식으로 시작하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음식을 들고 깊은 감사를 올리려 하나, 정작 감사를 받아줄 대상이 없음을 알아차리는, 끔찍한 외로움의 인식 – 이것이 횔덜린으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는 그리움인듯 하다. 혼돈과 힘, 젊음을 노래하려는 횔덜린은 결국 노래 자체를 노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인 내가 그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심장은 요동치는데, 말이 오히려 나오지 않“는 이 현상을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음식에 강복을 빌 때, 어느 이름을 부르면 좋으랴, 우리가
매일의 삶을 벗어나 쉼에 들 때, 말해보라, 어떻게 감사를 올리면 좋으랴?
드높은 자의 이름을 부르랴? 신은 명에 걸맞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으니,
그를 붙잡기에는, 우리의 희열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우리 침묵해야 할 때가 많으니, 성스러운 이름들이 모자라기에,
심장은 요동치는데, 말이 오히려 나오지 않는다니?
그러나 현금의 가락은 시간마다 음을 빌려주니,
마침 다가오는 천신들을 기쁘게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우리가 염려하는 바는 이미
거의 평화를 얻었으니, 이제 희열의 일부가 되었음이다.
이와같은 염려를, 기쁘던 괴롭던 간에, 영혼에 지녀야 하는 것이
가인의 되풀이되는 숙명이니,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하리라.
Wenn wir segnen das Mahl, wen darf ich nennen, und wenn wir
Ruhn vom Leben des Tags, saget, wie bring ich den Dank?
Nenn ich den Hohen dabei? Unschickliches liebet ein Gott nicht,
Ihn zu fassen, ist fast unsere Freude zu klein.
Schweigen müssen wir oft; es fehlen heilige Namen,
Herzen schlagen und doch bleibet die Rede zurück?
Aber ein Saitenspiel leiht jeder Stunde die Töne,
Und erfreuet vielleicht Himmlische, welche sich nahn.
Das bereitet und so ist auch beinahe die Sorge
Schon befriediget, die unter das Freudige kam.
Sorgen, wie diese, muß, gern oder nicht, in der Seele
Tragen ein Sänger und oft, aber die anderen nicht.

잡상 20170217

글이 풀리지 않아서 도서관 앞 영국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영국정원Englischer Garten은 영국식englisch이기도 하지만, 천사적engelsch이기도 하다. 프랑스식 공원에 비해서 영국식 공원은 자연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다. 모든 것이 자연인데, 자연을 „본따는 것“은 무슨 뜻인가?

글을 쓸 수 있는 때가 있고 없는 때가 있다. 일생의 대부분을 글을 쓸수 있는 상태로 보낸 사람들은 대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마 석사논문때 그렇게 집요하게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 생산 과정을 추적했던 것도 같다, 그도 나와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서).

글을 못쓰고 있을 때의 상황은 대체로 발밑만 보고 걸어 다니는 자세와 비슷하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거나, 멀리 가거나, 힘차게 걷기 위해서 항상 길을 볼 필요는 없다. 가끔만 보거나, 아예 보지 않아도 똑바로 잘 갈 수가 있다. 그런데 생각이 많아지면 자꾸 고개가 아래로 향한다. 내가 옳게 가고 있는지, 내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를 자꾸만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옳지 않은 방식의 작업이다.

산책 내내 발 밑을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엉망으로 젖은 길을 가고 있었고, 오랜만에 짐 없이, 정처 없이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처 없이 걷는 일은 헤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익혀두어야 하는 습관이다. 재능 없는 사람을 위한 명상과도 같다. 아무튼 바닥만 보면서 걷고 걷다가, 갑자기 눈을 들었더니 환했다. 우주충한 하늘 속으로 나무들이 걸어들어가고 있었고, 구름을 향해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바람을 빨아들이고 있었고… 또 잔디의 푸르름은 도저히 막을 길이 없이 세상에 번져나가고 있었고, 시냇물의 흐름은 세상의 숨소리 처럼, 멈춤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것은 한번도 시작한 적도 없고 멈춘 적도 없다. 곳곳에서 진리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나는 땅만 보고 있었다. 철학자를 원망해라.

조금 마음이 풀려서 글도 잊고 도서관으로 돌아오는데 거위 세마리, 거위 네마리, 거위 여덟마리가 내 앞을 휙, 시야를 낚아채면서 날아갔다. 나도 모르게 „잘 난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스스로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거위는 잘 날았기 때문이다.

 

트라클의 „노발리스에게“ – 노발리스의 „밤의 찬가“

10년 넘게 집요하게 읽던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시간이 지날 수록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하다. 8년 전쯤에, 당시 철학 박사논문을 쓰던 친구에게 „니체, 비트겐슈타인, 키에르케고르가 내게는 하나“라고 말하니까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 박사논문을 하나 써도 될 주제겠어“라고 놀리듯 말했다.

그후로 나는 릴케, 첼란, 트라클, 횔덜린, 하이데게 등을 읽었고, 노발리스도 만났다. 물론 모두들 독일어권의 거장들이니 서로가 서로를 읽고 좋아했던 것은 당연한 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런 증거를 만나면 참 기쁘다. 예컨대 비트겐슈타인이 릴케와 트라클에게 후원금을 보냈던 일. 릴케가 <두이노 비가.의 첫번째 완성본을 한창 동부 전선에서 전투 중이던 비트겐슈타인에게 보냈던 일이나, 그로덱 전투의 참상을 보고 마음이 무너진 트라클이 군병원에서 얼굴도 모르는 후원자 비트겐슈타인에게 „만나러 와주십시오“라고 쓴 편지, 비트겐슈타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트라클은 이미 자살한 뒤였다는 일화 등..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1차대전 참전 중에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를 읽었으며, 나중에는 노발리스를 읽었다는 사실 – 오늘날에는 별로 중요한 일들이 아닐지는 몰라도, 나는 역사라는 것이 단지 우리의 마음 속에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위대한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와 „서로를 알아봄“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트라클의 시들을 절반 이상 번역했지만 (어떤 출판사도 원하지 않았지만..) 오늘 노발리스 번역 해제를 위해서 공부하다가 <노발리스에게>라는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물론 언젠가 본적이 있는 시였지만, 시인과 시인의 대화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밤의 찬가“의 3번 찬가를 보고 트라클을 깊게 떠올리긴 했지만, 실제로 트라클이 횔덜린 외에 가장 중요한 시적 „형제“로 생각했던 시인이 노발리스였다는 사실은 오늘 알게 되었다. 혹시 해제에 사용할까 싶어서 일단 번역해두었다. 3가지 버전이 있는데 그 중 둘을 번역했다.

노발리스에게 

어두운 땅 속에서  쉬는 성스러운 이방인.

신은 그의 여린 입에서 비탄을 취했으니,

스스로 피운 꽃 속으로 그가 쓰러질 적에.

푸른꽃 하나

고통이 머무는 밤의 집에서 그의 노래를 이어 산다.

 

An Novalis (2.Fassung a)

In dunkler Erde ruht der heilige Fremdling.

Es nahm von sanftem Munde ihm die Klage der Gott,

Da er in seiner Blüte hinsank.

Eine blaue Blume

Fortlebt sein Lied im nächtlichen Haus der Schmerzen.

 

이방인Fremdling은 „낯선“이라는 형용사의 명사형인 낯선 자Fremder와는 다른 어감을 가지고 있다. 까뮈를 상기시킨다는 점만 빼면 „이방인“은 썩 괜찮은 번역어인듯 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Fremder는 „외부인“에 해당한다. 내가 세워놓은 경계를 침범하는 자가 외부인Fremder이라면, 내가 지금껏 모르던 경계에 들어서서 경이로워할때, 두려워할때, 흥분하거나 의심할때 – 즉 마음이 열리면서 철학과 예술이 시작될 수 있을 때를 나타내는 말이 이방인Fremdling이다. 전자가 대상의 언어라면, 후자는 주체의 언어다. 이 말은 노발리스가 <밤의 찬가>에서 사용했던 것을 트라클이 일종의 오마쥬로 사용한 것이다. 밤의 찬가에서는 바로 1번 찬가의 1연에서 나타난다.

 

살아있다면, 감각의 재능을 받았다면 그 누가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를 감싸고 펼쳐진 공간, 그 모든 찬란한 현상 중에도 가장 큰 기쁨을 주는 빛을 – 그 빛깔과, 그 뻗어나감과, 그 일렁임을. 우리를 일깨우는 낮의 부드러운 편재를. 생명 가장 깊이 깃든 혼처럼, 빛은, 휴식을 모르는 별들의 거대한 세계를 들이마시고, 그 푸른 물결 속을 춤추듯이 헤엄친다 – 빛을 들이마시는 것들 있으니, 불꽃을 품고 영속하는 광물, 감각하며 흡수하는 식물, 야성으로 불타오르는 다형多形의 동물 –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려한 이방인 있어, 사려깊은 눈을 하고, 떠다니는 듯한 걸음을 걷고, 수많은 음을 담은 입술을 살포시 닫고 있다. 지상의 자연을 다스리는 왕처럼, 빛은 모든 힘의 변천을 일으키고, 무한의 결속들을 맺고 또 풀며, 지상 모든 존재 위에 천상의 영상을 드리운다. – 오직 빛의 현존만이, 세상 모든 권역들의 휘황찬란함을 선포한다.  (밤의 찬가 1연, 박술 역)

 

빛의 세계 속에서 보고, 걷고, 노래하는 존재 – 다른 모든 존재보다도 장려하지만, 결국 이방인으로 남는 것이 노발리스가 바라본 인간이다. 낮의 세계, 가시적인 대상물이 거하는 곳, 이름과 색깔의 세계에서 이방인이라면, 인간의 집은 어디인가? 바로 밤이다.

 

이제 나는 마지막 아침이 언제일지 알게 되었다 – 빛마저도 밤과 사랑을 더는 피하지 않으며 – 잠마저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단 한편의 꿈으로 화할 때가 언제일지 알게 되었다. 내 안에서는 천상의 피로가 느껴진다. – 성스러운 묘소로 향하는 순례길은 멀고 힘겨워지고, 십자가는 내 몸을 짓눌러온다. 범속한 감각에는 들리지 않는 크리스탈의 물결이 산의 어두운 모태에서 흘러나오니, 지상의 파도는 산자락에 이르러 부서지도다. 그 물결을 맛본 자라면, 즉 세간의 국경성國境城 위에 올라 – 밤의 거처에 들어 – 저 멀리 새로운 땅을 바라본 적 있는 자라면, 진실로 세간의 일들로 돌아가지 않으리니, 그곳은 빛이 영원한 불안 속에 거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밤의 찬가 4연, 박술 역)

밤은 모태이며, 안전한 성벽이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단지 꿈으로 비치는 „세계의 심장“이다. <밤의 찬가>에서 „빛“이 „가상“의 동의어로, „밤“이 „구원“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은 놀라운 방식으로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그려내는 아폴론-디오니소스의 대립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젊은 니체(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바그너)는 노발리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조금 비약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반-이성주의에도 „낭만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어쨌던 간에, 트라클은 철학적 교각 없이도 „형제“ 노발리스를 알아보고 자신의 시적 심장의 일부로 녹여낸 듯 하다. 20세기의 시인 중에서 트라클만큼 빛의 독재를 증오하여 지하에 숨어 살았고, 어둠·광기·몽환을 찬양했고, 결국 그 막대한 대립항들 사이에서 짓눌려버린 자가 있는가? 

  누군가 갈림길에서 너를 두고 가버렸고 오랫동안, 너는 뒤를 돌아본다. 불구가 된 사과나무들, 그 그림자를 지나는 순은純銀의 발걸음. 검은 가지들 속에서 자주색으로 열매는 빛나고 풀숲 안에서 뱀은 껍질을 벗는구나. 오! 이 칠흙이여; 얼음 같은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과, 포도주에 잠긴 슬픈 꿈들이여, 촌락의 술집, 검게 그슬린 대들보 아래에서. 너, 아직 덤불 같은 야생이여, 갈색의 담배 구름들로부터 장밋빛 섬들을 소환해내고, 네 속으로부터 독수리의 거친 포효를 끄집어내니, 그것은 검은 절벽을 맴도는, 바다와 폭풍과 얼음을 가리지 않고 사냥하는 짐승이어라. 너, 녹색의 금속, 내부에는 화염의 얼굴을 가진 자여, 뼈의 언덕에 올라 어두운 미래들과, 천사의 불타는 추락을 노래하고 싶어하는 자여. 오! 절망이여,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털썩 무릎 꿇는 절망이여. (트라클 <악의 변신> 중에서, 박술 번역)

글의 처음에 소개했던 <노발리스에게>의 첫번째 버전을 마저 올린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들때 만민이 환호하며 야자나무 잎으로 그 가는 길을 치장했듯이, 트라클은 봄을 사도로 삼아 노발리스가 말없이 가는 비의의 길을 찬양한다. 그 자신은 이 길을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임을 알지만, 그 역시 „스스로 피운 꽃 속에 쓰러진“ 자이기에.

노발리스에게

수정의 대지 속에서 쉬는, 성스런 이방인

신이 그 어두운 입에서 비탄을 취했노라

스스로 피운 꽃 속으로 그가 쓰러질 적에

그의 현악이 평화롭게 죽어가던

가슴 속,

봄은 그 가는 길 앞에 야자나무 잎을 뿌렸으니,

그는 망설이는 걸음걸이로

밤의 집을 말없이 떠났음이다.

 

An Novalis (1. Fassung)

Ruhend in kristallner Erde, heiliger Fremdling

Vom dunklen Munde nahm ein Gott ihm die Klage,

Da er in seiner Blüte hinsank

Friedlich erstarb ihm das Saitenspiel

In der Brust,

Und es streute der Frühling seine Palmen vor ihn,

Da er mit zögernden Schritten

Schweigend das nächtige Haus verlie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