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한국어 번역에 대해서

1. 철학 텍스트의 번역 문제: „정확성“은 개념 번역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철학 텍스트의 번역이 어려운 것은 대부분 역자와 대상어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철학 텍스트 번역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문제들은 여기에서 온다. 흔히 철학번역에서 중시되는 어원적 정확성, 학문적 적합성, 다른 개념들과의 정합성, 이런 것들은 도리어 마지막에 고려해야 할 문제다. 아무리 정밀한 해석의 시스템으로 빈틈없이 접합시킨다 하더라도, 몇몇 철학적 텍스트는 정교함의 방식으로는 온전히 담아내기가 어렵다. 어떤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유는 개념과 시스템을 정립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개념에 대한 의구심에서, 기존의 언어가 과연 철학의 도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회의에서, 나아가 모든 이론적 견고함에 대한 환상을 철저히 파괴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적 저작이 이러한 성향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지만, 독일어권에서는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가 단연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자와 외국어의 거리가 먼 경우에, 역자는 (흔히 해당 언어에서 가장 언어적으로 수준이 높은) 대상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서 2차 문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학자들이 정립해 놓은 해석을 참고하여, 거기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통해서 원전을 관찰하는 것으로 접근방법이 제한되는 것이다. (한국어 번역의 경우에는 그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일본어 번역어 계열의 조어들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작업에서 자주 발생하는 결과물은 이해하기 쉽고,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번역이다. 예를 들어서 논리-철학 논고의 전설적인 첫 문장 “Die Welt ist alles, was der Fall ist”는 번역을 거치며 눈 깜짝할 새에 “세계는 성립되어 있는 사항들의 총체이다.”(김양순 번역)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러한 번역은 ‘정확한’ 번역이고, 학술적으로 무난하고, 잘 읽힌다. 하지만 나는 이 첫 문장의 번역을 보고서 처음으로 내가 비트겐슈타인을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해석이 틀려서가 아니라, 접근의 방식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위의 번역문은 “Die Welt ist alles, was der Fall ist”이라는 짧은 문장에서 내가 받았던,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감,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저 말을 결국 이해했을 때 느꼈던 감동의 어떤 부분과도 상관이 없다. 그냥 철저히 해부당해서 죽임당한 말 껍데기인 것이다. 독자가 신비로움을 느낄 자리도 없고, 해석을 시도할 때의 들뜬 흥분도 없고, 젊은 비트겐슈타인의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오만함도 없다. 그 실체는 수백번을 곱씹어봐도 결코 쉽게 해석되지 않는 문장, 그럴수록 한번 이해하면 다시는 잊혀지지 않는 문장, 그런 문장인데 말이다.

철학이 시작되는 지점은 “사항의 성립”이나 “그림이론”과 같은 이론적 언사를 이해하려는 욕구가 아니다. 어떤 철학은 아무런 전제조건도 없이, 마치 눈부시게 빛나는 칼날처럼 독자의 마음을 찌르고 들어올 뿐이다. ‘너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이 있다. 내가 길을 보여 주겠다’. 이렇게 말하는 강력한 유혹이, 이미 개념이 형성되기 전의 공간, 순수한 언어적 층위에서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다가왔다. 비트겐슈타인의 글에는 완벽한 시나 음악과 비슷한 면이 있었는데, 나는 이런 독서의 경험이 이 철학적 저서의 단편이 아니라 바로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철학에 이러한 비이론적 측면이 있다면, 그러한 비이론적 측면은 비이론적인 번역방식을 요구한다. 개념을 개념으로 번역하면, 당연히 어조, 어감, 그리고 무수히 많은 언어적 장치들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다른 글에서 말하겠지만, 개념의 통일을 추구하다보면, 언어적 측면의 희생은 당연하게 수반되는 결과다). 반대로 언어적 장치를 언어적 장치로, 수사를 수사로, 문학성을 문학성으로 번역한다면 어떨까? 나아가, “개념”이라는 것이 그러한 언어적 구조물들이 엉킨 장소에서 감히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려는, 비트겐슈타인 말대로 ‘구원의 한마디’를 찾아 헤매는 철학자가 자신을 언어와의 싸움 속에 내던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가? 결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되지 않았으나, 결국 부수적으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드문 물건이 바로 개념이라면?

우리가 너무도 명확하다고 흔히 생각하는 비트겐슈타인들의 기본 개념들 – 예컨대 “명제”, “논리”, “단어”, “지칭”… 이러한 개념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전통으로 전수 된 것도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일기장의 첫 장에 “논리는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 Die Logik muss für sich selber sorgen”이라고 써넣던 순간에, 그는 논리가 무엇인지, 논리학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는 어떤 거대한 예감에 이끌려 생각을 시작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자이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즉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개념적 사유인 동시에, 새로운 개념을 향한 사유이며, 오래된 개념의 혼란에 대한 사유이다. (그리고 어쩌면, 개념의 허무함에 대한 사유일 수도 있다.) 특히 아직 논리-철학 논고를 쓰고 있는 과정인 일기장의 텍스트에서는 그러한 실험적이고 임시적인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텍스트에서 우리는 일상어와의 접경지대에서, 일상어의 영역에 힘입어, 개념이 어떻게 처음으로 발생하는지를 목도할 수 있다. 이 과정 자체가 사실 대단히 언어철학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회의적인 순간에는 나도 이렇게 자문하기도 한다: 과연 이런 텍스트를 번역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정립되지 않고, 정돈되기 전의 어지러운 모양새를 옮긴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제대로 치워놓지 않은 방의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 문제에 제대로 된 반응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원숙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해야 한다.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방법을 이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Eine der wichtigsten Aufgaben ist es, alle falschen Gedankengänge so charakteristisch auszudrücken, daß der Leser sagt „ja, genau so habe ich es gemeint“. Die Physiognomie jedes Irrtums nachzuzeichnen. (BT, 410, 2)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모든 잘못된 생각의 과정들을 충분히 특징적으로 표현하여, 독자가 이렇게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맞아, 내가 말하는 게 바로 그거야.” 모든 오류의 외양을 포착하여 묘사하는 것이다. (대타자본, 410, 2)

즉, 어지러우면 어지러움을 보여주고, 혼란스러우면 혼란을 보여주고, 길을 잃었으면 길을 잃은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상당히 기술적인 면모를 보이기 때문에, 사유에 “이입”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어감의 미묘한 변화. 무의식적인 단어선택의 변경을 ‘충분히 특징적으로 잡아낸다면’ 독자도 여기에서 어떤 갈등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번역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완성된 이론이 아니라 (나는 그런 것이 – 심지어 초기의 –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었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이론을 갈구하는 철학자의 내적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철두철미하게 학문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인격이 철학이라는 대상을 만나서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 그 역사를 그려본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이보다 ‘더 정확한’ 방식이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

위에서 말했듯이, 번역의 문제는 대상언어와의 거리에서 온다. 그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 가운데에서 기존 해석과 번역어의 길로 빠지고,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큰 위험이다.

다음 글에서는 위에서 기술한 방식으로 (수사를 수사로, 언어적 장치를 언어적 장치로) 번역을 시도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떠한 차이점들과 문제점들이 발생하는지 조사해보려고 한다.

우선 비트겐슈타인 철학 전반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개념, Satz(“명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Satz의 번역어로는 “문장”을 사용하는 바인데, 거기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다음 글에서 진행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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