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 2015.9.20

나는 지금 이 세계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 시대의 기술과 학문과 문화가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조류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니체의 기본적 문제의식을 같이하고, 그 사람들의 친구이자 제자인 셈이다. 지배당하고 휩쓸려버린 옛 세계의 철학자들은 여태 스스로의 입으로 이 현상에 대해서 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예전 체계의 사람들은 현대의 언어를 말하지 못하였고, 과도기의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언어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예외적인 재능과 교육을 누렸던 몇몇의 사람들만이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고, 동양에서는 오직 일본인만이 이 문제에 대해서 성찰을 할 정황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문화의 큰 힘이었다. 지금은 그 힘이 다한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리스도교의 상징적 힘과 과학문명의 기술적 힘이 결합되어 나타난 지금의 주류문명은 세계를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패권 앞에서 옛 세계는 침묵을 강요당했고, 그것은 지배받는 자의 슬픔이라기보다는 (패권은 언제나 바뀌는 법이니까) 정신적 기반을 파괴하는, 스스로의 정신마저도 파괴할 준비가 되어있는 문명 앞에서 느끼는 무력함과 연관이 있다.

유럽정신은 기민하고, 그 과학성은 맹목적으로 진솔하다. 바로 이 점을 통해서 정신적인 와해가 내부로부터 진행되고 있었고, 근대정신이 태어나면서 그것을 탄생시킨 기저문화는 마치 채석장과 같은 입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줄곧 빛나는 것은 근대정신이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사실 (침묵하게 된) 기저문화의 풍부함이었다. 나는 자유, 평등, 과학 등의 강력한 논리들이 사실 18-19세기의 유럽문화의 정점을 이루었던 정신과 내적으로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철저히 반대될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느끼고 있다. 자유의 문화는 비자유의 문화를 소비하며, 후자를 끝까지 소비하고 나면 자기 자신을 먹어치워야 하는 입장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교는 어째서 제도와 과학으로 세속화되었으며, 왜 이렇게 변질될 수밖에 없었는가? 유대교와 그리스 정신의 이 이상한 혼종은 왜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여기서는 일종의 신정론Theodizée에 해당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옛 세계가 대단하거나 더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면, 어째서 근대라는 괴물적인 현상은 그것을 그토록 손쉽게 파괴할 수 있었는가? 혹여, 실제로 다른 문화들의 역량이 열등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우리는 경전이 없는 세계에 살게 되었다. 이것은 나라는 개인에게는 대단히 큰 고통이다. 나를 형성시킨 언어와 문화에는 경전을 향한 몸부림이 남아있고, 마치 아픈 사람이 약을 찾듯이 경전을 향해 손을 뻗치는 움직임이 내 마음에도 전승되었다. 하지만 경전 그 자체가 전수되지는 않았다. 경전을 읽으려는 마음은, 과학을 하려는 마음과 정반대의 것이다. 경전을 읽으려는 마음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제도를 보수하려는 움직임과도 상이하다. 경전을 읽으려는 마음은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이 아니라, 안과 뒤를 향해 움직이는 자세다. 또는, 전혀 움직이지 않으려는 자세다. 서양의 중세에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 Noli foras ire, in te ipsum redi, in interiore homine veritas habitat. 내가 라틴어로 외우고 있는 유일한 문장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문장은 „바깥으로 가지 마라, 네 안으로 회귀하라. 인간의 내부에 진리가 살고 있다“라는 뜻인데, 10년 전에 이것을 듣고 뭔가 깊은 위안을 받았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경전을 숭상하는 옛사람의 마음에는 참을수 없이 아름다운 무언가가 있다. 고대를 바라보는 근대인의 삐뚤어진 마음이 아름다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더 이상 그 균열마저 바라보지 못하는 현대의 마음은 그저 참을 수 없을 뿐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이렇게 큰 균열의 언어를 숨쉬고 있으면, 문제에서 눈을 돌릴 틈이 없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이 가짜이며, 모든 단어는 남의 것이며.. 이 세계가 마치 얼기설기 이어진 판자집과 같다는 의식을 잃어버릴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국어는 경전읽기의 전통, 즉 한문언해체의 전통을 아직 많이 담고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 그런 전통에 접속할 수 없는 언어도 많을 것인데, 한국어는 아무튼 유리한 위치에 있는 편에 속한다. 논리학 수업을 하면서 느끼는 점이지만, 언어구조 자체가 서양화에 저항하는 구석도 많이 있다. 이런 경우에 언어 그 자체가 마지막 방벽이 되어주는 셈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세계에 와있다. 신나지는 않지만 할 일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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