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클의 „노발리스에게“ – 노발리스의 „밤의 찬가“

10년 넘게 집요하게 읽던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시간이 지날 수록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하다. 8년 전쯤에, 당시 철학 박사논문을 쓰던 친구에게 „니체, 비트겐슈타인, 키에르케고르가 내게는 하나“라고 말하니까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 박사논문을 하나 써도 될 주제겠어“라고 놀리듯 말했다.

그후로 나는 릴케, 첼란, 트라클, 횔덜린, 하이데게 등을 읽었고, 노발리스도 만났다. 물론 모두들 독일어권의 거장들이니 서로가 서로를 읽고 좋아했던 것은 당연한 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런 증거를 만나면 참 기쁘다. 예컨대 비트겐슈타인이 릴케와 트라클에게 후원금을 보냈던 일. 릴케가 <두이노 비가.의 첫번째 완성본을 한창 동부 전선에서 전투 중이던 비트겐슈타인에게 보냈던 일이나, 그로덱 전투의 참상을 보고 마음이 무너진 트라클이 군병원에서 얼굴도 모르는 후원자 비트겐슈타인에게 „만나러 와주십시오“라고 쓴 편지, 비트겐슈타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트라클은 이미 자살한 뒤였다는 일화 등..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1차대전 참전 중에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를 읽었으며, 나중에는 노발리스를 읽었다는 사실 – 오늘날에는 별로 중요한 일들이 아닐지는 몰라도, 나는 역사라는 것이 단지 우리의 마음 속에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위대한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와 „서로를 알아봄“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트라클의 시들을 절반 이상 번역했지만 (어떤 출판사도 원하지 않았지만..) 오늘 노발리스 번역 해제를 위해서 공부하다가 <노발리스에게>라는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물론 언젠가 본적이 있는 시였지만, 시인과 시인의 대화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밤의 찬가“의 3번 찬가를 보고 트라클을 깊게 떠올리긴 했지만, 실제로 트라클이 횔덜린 외에 가장 중요한 시적 „형제“로 생각했던 시인이 노발리스였다는 사실은 오늘 알게 되었다. 혹시 해제에 사용할까 싶어서 일단 번역해두었다. 3가지 버전이 있는데 그 중 둘을 번역했다.

노발리스에게 

어두운 땅 속에서  쉬는 성스러운 이방인.

신은 그의 여린 입에서 비탄을 취했으니,

스스로 피운 꽃 속으로 그가 쓰러질 적에.

푸른꽃 하나

고통이 머무는 밤의 집에서 그의 노래를 이어 산다.

 

An Novalis (2.Fassung a)

In dunkler Erde ruht der heilige Fremdling.

Es nahm von sanftem Munde ihm die Klage der Gott,

Da er in seiner Blüte hinsank.

Eine blaue Blume

Fortlebt sein Lied im nächtlichen Haus der Schmerzen.

 

이방인Fremdling은 „낯선“이라는 형용사의 명사형인 낯선 자Fremder와는 다른 어감을 가지고 있다. 까뮈를 상기시킨다는 점만 빼면 „이방인“은 썩 괜찮은 번역어인듯 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Fremder는 „외부인“에 해당한다. 내가 세워놓은 경계를 침범하는 자가 외부인Fremder이라면, 내가 지금껏 모르던 경계에 들어서서 경이로워할때, 두려워할때, 흥분하거나 의심할때 – 즉 마음이 열리면서 철학과 예술이 시작될 수 있을 때를 나타내는 말이 이방인Fremdling이다. 전자가 대상의 언어라면, 후자는 주체의 언어다. 이 말은 노발리스가 <밤의 찬가>에서 사용했던 것을 트라클이 일종의 오마쥬로 사용한 것이다. 밤의 찬가에서는 바로 1번 찬가의 1연에서 나타난다.

 

살아있다면, 감각의 재능을 받았다면 그 누가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를 감싸고 펼쳐진 공간, 그 모든 찬란한 현상 중에도 가장 큰 기쁨을 주는 빛을 – 그 빛깔과, 그 뻗어나감과, 그 일렁임을. 우리를 일깨우는 낮의 부드러운 편재를. 생명 가장 깊이 깃든 혼처럼, 빛은, 휴식을 모르는 별들의 거대한 세계를 들이마시고, 그 푸른 물결 속을 춤추듯이 헤엄친다 – 빛을 들이마시는 것들 있으니, 불꽃을 품고 영속하는 광물, 감각하며 흡수하는 식물, 야성으로 불타오르는 다형多形의 동물 –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려한 이방인 있어, 사려깊은 눈을 하고, 떠다니는 듯한 걸음을 걷고, 수많은 음을 담은 입술을 살포시 닫고 있다. 지상의 자연을 다스리는 왕처럼, 빛은 모든 힘의 변천을 일으키고, 무한의 결속들을 맺고 또 풀며, 지상 모든 존재 위에 천상의 영상을 드리운다. – 오직 빛의 현존만이, 세상 모든 권역들의 휘황찬란함을 선포한다.  (밤의 찬가 1연, 박술 역)

 

빛의 세계 속에서 보고, 걷고, 노래하는 존재 – 다른 모든 존재보다도 장려하지만, 결국 이방인으로 남는 것이 노발리스가 바라본 인간이다. 낮의 세계, 가시적인 대상물이 거하는 곳, 이름과 색깔의 세계에서 이방인이라면, 인간의 집은 어디인가? 바로 밤이다.

 

이제 나는 마지막 아침이 언제일지 알게 되었다 – 빛마저도 밤과 사랑을 더는 피하지 않으며 – 잠마저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단 한편의 꿈으로 화할 때가 언제일지 알게 되었다. 내 안에서는 천상의 피로가 느껴진다. – 성스러운 묘소로 향하는 순례길은 멀고 힘겨워지고, 십자가는 내 몸을 짓눌러온다. 범속한 감각에는 들리지 않는 크리스탈의 물결이 산의 어두운 모태에서 흘러나오니, 지상의 파도는 산자락에 이르러 부서지도다. 그 물결을 맛본 자라면, 즉 세간의 국경성國境城 위에 올라 – 밤의 거처에 들어 – 저 멀리 새로운 땅을 바라본 적 있는 자라면, 진실로 세간의 일들로 돌아가지 않으리니, 그곳은 빛이 영원한 불안 속에 거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밤의 찬가 4연, 박술 역)

밤은 모태이며, 안전한 성벽이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단지 꿈으로 비치는 „세계의 심장“이다. <밤의 찬가>에서 „빛“이 „가상“의 동의어로, „밤“이 „구원“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은 놀라운 방식으로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그려내는 아폴론-디오니소스의 대립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젊은 니체(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바그너)는 노발리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조금 비약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반-이성주의에도 „낭만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어쨌던 간에, 트라클은 철학적 교각 없이도 „형제“ 노발리스를 알아보고 자신의 시적 심장의 일부로 녹여낸 듯 하다. 20세기의 시인 중에서 트라클만큼 빛의 독재를 증오하여 지하에 숨어 살았고, 어둠·광기·몽환을 찬양했고, 결국 그 막대한 대립항들 사이에서 짓눌려버린 자가 있는가? 

  누군가 갈림길에서 너를 두고 가버렸고 오랫동안, 너는 뒤를 돌아본다. 불구가 된 사과나무들, 그 그림자를 지나는 순은純銀의 발걸음. 검은 가지들 속에서 자주색으로 열매는 빛나고 풀숲 안에서 뱀은 껍질을 벗는구나. 오! 이 칠흙이여; 얼음 같은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과, 포도주에 잠긴 슬픈 꿈들이여, 촌락의 술집, 검게 그슬린 대들보 아래에서. 너, 아직 덤불 같은 야생이여, 갈색의 담배 구름들로부터 장밋빛 섬들을 소환해내고, 네 속으로부터 독수리의 거친 포효를 끄집어내니, 그것은 검은 절벽을 맴도는, 바다와 폭풍과 얼음을 가리지 않고 사냥하는 짐승이어라. 너, 녹색의 금속, 내부에는 화염의 얼굴을 가진 자여, 뼈의 언덕에 올라 어두운 미래들과, 천사의 불타는 추락을 노래하고 싶어하는 자여. 오! 절망이여,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털썩 무릎 꿇는 절망이여. (트라클 <악의 변신> 중에서, 박술 번역)

글의 처음에 소개했던 <노발리스에게>의 첫번째 버전을 마저 올린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들때 만민이 환호하며 야자나무 잎으로 그 가는 길을 치장했듯이, 트라클은 봄을 사도로 삼아 노발리스가 말없이 가는 비의의 길을 찬양한다. 그 자신은 이 길을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임을 알지만, 그 역시 „스스로 피운 꽃 속에 쓰러진“ 자이기에.

노발리스에게

수정의 대지 속에서 쉬는, 성스런 이방인

신이 그 어두운 입에서 비탄을 취했노라

스스로 피운 꽃 속으로 그가 쓰러질 적에

그의 현악이 평화롭게 죽어가던

가슴 속,

봄은 그 가는 길 앞에 야자나무 잎을 뿌렸으니,

그는 망설이는 걸음걸이로

밤의 집을 말없이 떠났음이다.

 

An Novalis (1. Fassung)

Ruhend in kristallner Erde, heiliger Fremdling

Vom dunklen Munde nahm ein Gott ihm die Klage,

Da er in seiner Blüte hinsank

Friedlich erstarb ihm das Saitenspiel

In der Brust,

Und es streute der Frühling seine Palmen vor ihn,

Da er mit zögernden Schritten

Schweigend das nächtige Haus verlie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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