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단상

여름이 가고도 모자라서 11월이 오고 한해의 마지막이 오고 감기까지 걸리고서 나서야 겨울이구나, 생각한다. 트라클의 시 중에서 schwarze Novemberzerstörung이라는 시어가 있다. „검은 11월의 파멸“라는 뜻이다. 독일인이 11월을 떠올리면 마음속에 들리는 음악을 이렇게 파괴적으로 담아낸 싯구는 두번 다시 없을 것 같다.

저녁기도 무렵 이방인은 자신을 잃어버린다, 검은 11월의 파멸 속에서,

삭아버린 나뭇가지 아래에서, 나병 고름 가득한 성벽을 걸으면서,

예전 그의 성스러운 형제가 걸었던 곳,

광기의 달콤한 현악에 빠졌던 곳에서.

<헬리안Helian>

독일식으로 생각하면, 큰 고통은 그 고통을 초월하는 움직임으로 이끈다. 이 초월의 방식은 동양적으로 보면 달관이나 해탈이겠으나, 독일적으로 보면 광기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예감했던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재림 역시, 큰 내적 고통을 무화시키는 더욱더 강대한 힘에 대한 것이다. 고통이 없는 곳은, 고통과 기쁨의 구분이 사라져버린 공간이다.

그렇기에 트라클은 가장 큰 아픔과 직면하면서, 생명도 썩어버리고 역사(성벽)도 곪아버린 허무의 지점에 이르러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자신을 잃어버린 곳에서 그가 만나는 것은 무無가 아니다. 그것은 „성스러운 형제“란 말로 가려진 시적 우상 횔덜린이며, 그가 상징하는 광기와 음악이 하나된 초월적 순간이다. 광기의 달콤한 현악에 귀기울일수밖에 없을때, 아픔은 사라진다.

물론 „현대 독일인“에게 이런 „고전적 독일“은 너무나 낯설다. 산업화와 민족주의라는 근대의 질병들과 합쳐졌을때 일어났던 살인적 광기에 대한 트라우마적 기억 탓이다. 트라우마의 성격상 광기는 이제 부인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제 반대급부로 독일인을 지배하는 것은 계산적 이성, 그 중에서도 냉소이다.

같이 „문화간 신비주의?“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하는 T교수와 점심을 먹다가, „고전적 독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한국에 있던 시절에 헤르만 헤세를 읽으면서, 독일에 가면 라틴어로 시를 짓는 아이들이 있을줄 알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자 껄껄 웃었지만, 물론 그도 몇 남지 않은 고전적 인간이기 때문에 슬픔이 담겨있었다. 그 역시 남부 티롤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자란 사람이다. 내가 다닌 학교도 예전에 베네딕트 수도원 건물이었고, 내가 갔을때는 예수회 소유였다. „고전적 독일문화를 한마디로 하자면“ T 교수가 말했다. „비이성적인 것을 추구하되, 이성적인 수단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는 점이지“

세미나를 계기로 그가 나를 동료로 대해주고는 있지만 항상 그에게 감탄한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나는 숨기지도 않는다.

철학을 그 고대 그리스적 원천을 통해서 정의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해야하는가, 하는 논의가 이어졌다. 그는 모범적 고전적 인간답게 로고스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로고스, 즉 담론적, 논리적 요소가 중심적이어야 철학이라는 것이다. 나는 평소의 마음대로 „총체성을 의도하는 언어가 즉 철학 아닌가“라고 쳐보았다. 그의 두뇌회전은 아주 빠르기 때문에 1초 정도 생각하더니 „그러면 신화도 철학이어야 한다“라고 반론했다. 훌륭한 반격이었지만 나는 신화도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0의 대미지를 입었다.. 가 아니라 이 반론은 내가 박사논문에 있어서 큰 고민과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초만에 내 논문을 망가뜨려줘서 참 감사합니다..

고민을 하다가 해결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의 두뇌는 더 열심히 일을 하는 대신에 감기에 걸리는 쪽을 택했다. 생각이 아닌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강제한 것이다… 아무튼 그때부터 닷새째 일을 못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아픈 시간이 싫지 않다. (억지로 하는) 명상과 비슷하다고 생각을 많이 한다. 확실히 뇌의 분석적 부분들이 작동을 안하고 아주 기본기능만 할때 오는 깊은 치유적 효과가 있다. 아플 수 있다는 사실도 고맙게 여겨질때가 있다. 지금처럼, 이상하고 어두운 곳에 누가 흘린 액체처럼 누워있다가 서서히 단단함이, 힘이 돌아올때가 그렇다.

4 Kommentare zu „11월 단상

  1.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혹시 글 중간에 번역하신 시를 다른 곳에 공유해도 괜찮을까요? 잘 번역하신 듯 해서 올려보고 싶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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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네 물론 공유 가능합니다. 막간을 이용해 광고를 하자면 저의 트라클 전집 번역본인 „몽상과 착란“이 2월 읻다 출판사에서 출간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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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앗 감사합니다!

        트라클 시 선집은 나온다는 소식만 들었었는데 2월에 나오나 보네요 기대하고있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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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플 수 있을 때가 고맙기도 하고, 지금 이렇게 갇혀 있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연말에는 모두가 이 혼돈에서 벗어나 창조와 발산에 대한 에너지가 더더욱 충만했으면 좋겠다… 늘 글에 재미난 반전과 통찰들이 군데군데 숨어 있다. 흑. 재미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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